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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당신이라면 다 괜찮을 것 같아요.
    B망상연재게시판/사랑하는 방법에 대하여 (조아라) 2021. 3. 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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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yOHv5yjskJg


    수열이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듣고 난 이후,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떠났다. 

    떠나가는 나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따라오지 않았기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늘 너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했는데.. 사실은 늘 네 곁에 있는 게 두려워서 도망치는 일이 더 많았구나. 

     

     

    " 하아.. 어쩌지.. "

     

    수열이가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서 날 잘 따르고 의지한다고 생각했었지..

    나도 수열이에게 마음을 가지게 된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스륵 -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고 소파에서 일어나 푸르스름한 하늘을 바라봤다. 

     

    집에 오자마자 피로가 몰려들었지만 침대에 눕고 싶진 않았다.

    수열이가 우리 집에서 자고 지냈던 날이 떠올라서, 더 마음이 싱숭생숭 해질 것 같아서 결국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 수열아.. "

     

     

    수열이가 나를 좋아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둘 다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사실은 이어질 수 없다는 걸 망각하고 있었나 보다. 

     

    서로가 사랑한다면 문제가 될 게 없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나 자신에게 확신이 없었다.

    평생을 내가 그의 눈에 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매력을 느꼈던 부분도 무덤덤해지고 더 이상 설렘을 느끼지 않고 나에게서 아예 마음을 접고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까 더더욱 수열이와 그런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늘 그랬듯이... 내가 노력을 한다고 해서 크게 발전되는 관계란 없었으니까...

     

    " 차라리 몰랐으면 편했을 텐데.. "

     

    혼자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생각날 때마다 아주 잠깐 마음 아프고, 울고 나면 끝날 일들일 텐데 이젠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온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하다. 

     

    너와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너와 나는 서로를 좋아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말들을 해도.. 수열이가 과연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평소 지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을까..

     

    수열이를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그를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아예, 이렇게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해야 할 순간이 오겠지.

     

    지금 당장은 무리지만...

     

     

     

    이불을 대충 치우곤 거의 비어있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대충 입 안을 게워냈다. 

    입맛이 없는 것도 당연하고, 감정이 내 모든 걸 지배하는 것 같아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 기분으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학생들과의 약속이 있기도 하고 작가님과의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홀로 있을 시간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오늘 출근을 하기 전에 예전에 작가님에게 주려고 사놨다가 주지 못해 보관만 해놨던 선물들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쌀쌀한 날씨와 더불어 우중충한 하늘은 비가 내릴지, 눈이 내릴지 알 수 없었다.

    이왕 날씨에 변화가 생긴다면 차라리 시원하게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 XX 학원으로 가주세요. "

     

    평소 같았으면 그냥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인데, 요즘은 거의 택시를 타고 이동했던 것 같다.

    걸어갈 힘도 없었고, 버스를 탔다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마주친다면 내 상황에 대해서 설명할 기력도 없었으니까..

     

    내 스스로가 많이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학원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걱정을 받고 난 이후였다.

     

    ' 선생님 다이어트해요? '

     

    ' 민쌤, 어디 아픈 거 아니죠..? ' 

     

    그 말을 듣고 집에 가서 몸무게를 확인했을 땐 단기간 안에 3kg 정도가 빠졌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챙기기 위해 이것저것 먹어봤지만, 먹는 족족 다 뱉어내기에 바빴고 몸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망가지고 있다는 걸 하루하루 느끼고 있을 때 즈음 작가님과 약속한 날이 왔다. 

     

    "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선생님.. "

     

    " 김 선생님도 고생하셨어요. "

     

    " 민쌤.. "

     

    " 네? "

     

    처음 내가 이 학원에서 일하기 전부터 다니고 계시던 김 선생님은 그나마 학원에서 가장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생일이라면 생일을 챙겨주고, 학원에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챙겨줬던 사람이라 늘 고맙게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저번에 이권도와 함께 차를 타고 있던 걸 걸려서 그때 이후로 뭔가 굉장히 어색했었는데.. 

     

    " 이거 받아요. 요즘 잘 못 챙겨 먹고 다니는 것 같아서요.. "

     

    그녀의 손에서 내 손으로 건네진 것은 다름 아닌 디저트가 담긴 작은 종이 박스였다.

    이 집 마들렌 맛있다고 저번에 선물로 드렸는데 기억하고 계셨구나.. 

     

    " 이렇게 안 챙겨주셔도 되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

     

    " 저번에 먹었던 마들렌이랑 다른 디저트들도 좀 챙겼어요.. 많이 힘들면 도와줄 테니까 언제든 말해요! "

     

    그녀 또한 고3을 담당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걱정되어 언제든 도움을 청하라는 말에 미소로 답을 전했다.

    그리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학원 문을 열고 나섰다.

     

    차분하게 계단을 내려오면서 핸드폰을 확인해보지만, 알림이라곤 뜨지 않았다.

    이권도에게서 아직도 연락이 안 온 거 보면.. 아직 학원 앞에 도착하지 못한 걸까..?

     

    저녁 늦게 그에게 바쁜 약속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연락이 없으니 또 같은 상황이 일어날 것 같아서 기대 조차 들지 않는다.

     

     

    탁- 

     

    타닥 -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내려오면 올수록 피곤함이 몰려오고, 텅 빈 공허함에 금방이라도 몸이 땅으로 기울어질 것만 같아.. 

     

    눈 앞에 있는 계단들이 흐려지고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 그대로 앞으로 몸이 넘어가는 게 느껴지는 순간,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누군가의 품 안에 안겼다. 

     

    " 시형 씨..! 괜찮아요? "

     

    " ... 작, 작가님? "

     

    " 괜찮아요? "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권도였다.

     

    그는 넘어질뻔한 나를 오른 팔로 감싸고 내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고, 나는 그를 흐린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지금까지 알게 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안 오실 줄.. 알았는.. 데.. "

     

    " 약속했잖아요. 그리고 당일에 약속을 취소하는 그런 못된 짓은 더 이상 안 해요. " 

     

    " 아.. 감, 감사합니다. "

     

    그의 품에 계속 안겨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서둘러서 자세를 고쳐 잡으니 그제야 이권도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였다. 

    저녁이라 머리를 살짝 내리고 무릎까지 오는 긴 코트를 입은 그의 모습이 꽤 근사하게 보였다.

     

    최근에는 뭘 봐도 감흥이 없었는데 겨우 사람 한 명 만났다고 이렇게 눈이 즐거울 수가 있을까.. 

     

    " 오랜만에 보는데.. 시형 씨는 잘 못 지냈나 봐요. "

     

    " 아.. 작가님은 늘 근사하셔요. "

     

    " 좋은 말 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걱정하고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

     

    " 죄송합니다.. "

     

    " 아무것도 못 먹은 것 같은데, 어서 타요. "

     

    이권도와 오랜만에 만났지만, 예전처럼 밝게 그를 맞이해줄 기운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평소 그대로 나에게 배려를 해주는 모습에, 그에게 가지고 있던 부담이 조금씩 사라진다.

     

    " 작가님은 저녁 드셨어요? "

     

    " 저녁을 먹기엔 많이 늦은 시간이긴 하죠. 그래도 시형 씨랑 같이 먹으려고 참았어요. "

     

    " 제가 약속 시간을 늦게 잡아서 죄송해요. "

     

    " 내가 보고 싶어서 먼저 찾아왔을 걸요? "

     

    아무렇지 않게 사람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말을 하길래 무슨 표정으로 그가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곁눈질로 이권도를 쳐다봤다. 

     

    그는 앞을 보면서 운전을 하고 있었지만, 착각일지 몰라도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피어있는 것 같았다. 

     

    내 눈길이 느껴졌는지 이권도가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 순간, 그와 시선을 마주 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머리 위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고개는 들지 않고 손에 들린 종이가방만을 꽉 잡았다. 

     

    " 작업실을 치워놓긴 했는데..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니라서 추울 거예요. "

     

    " 초대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아! 이거.. "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천천히 작업실을 둘러보는 중에 손에 들린 종이 가방을 이권도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눈빛을 하며 그가 가방 안을 살펴보는 동안 그의 어깨 뒤로 펼쳐진 작업실 풍경을 훑어봤다.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는 파일들과 군데군데 놓여있는 액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이권도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을 때 봤던 사진이다. 

     

    무척이나 외롭다고 생각이 들었던 사진을 오늘 보니, 묘하게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아서 자꾸만 눈길이 간다. 

     

    " 선물 챙겨줘서 고마워요. 액자에 다른 냄새가 섞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 이건 집에서 사용할게요. "

     

    " 앗,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는데.. 죄송해요. "

     

    " 선물을 준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닌데.. 우선 식사부터 할까요? "

     

    그를 따라 작업실 안쪽에 위치한 또 다른 룸으로 발을 옮겼다.

    바깥에 있는 모던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편하고 안락한 인테리어와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식탁이 눈에 들어온다. 

     

    " 바쁠 때는 종종 여기서 식사를 해결하거나 쉬기도 해요. 손님들을 데리고 와서 이야기도 하고.. "

     

    " 여기도 근사하네요.. "

     

    " 물론 시형 씨 보여주려고 열심히 꾸미긴 했지만요. "

     

    " 정말요? "

     

    " 농담인 것 같아요? 나 시형 씨 꼬시려고 되게 노력 많이 하는데. "

     

    순간적으로 내가 들었던 말이 진짜가 맞는 건지 확인하고 싶어서 이권도를 바라봤다.

    얼굴을 보니 웃고 있지만 약간 내려앉은 목소리는 농담으로 들리진 않았다. 

     

    " 작가님이 절 좋게 봐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

     

    안 그래도 마음이 심란한데 이권도가 그 틈을 파고드는 것 같아서 불안해진다. 

    이미 수열이와 있었던 일 때문에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다른 사람에 의해서 또 무차별적으로 흔들리고 싶지 않으니까..

     

     

    -

     

     

    이권도와의 식사는 불편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시간을 보냈다.

     

    정확하게는 식사 시간 내내 입에 맞지 않는 양식 때문에 속이 느끼하기도 했고, 그가 술을 권유했지만 술을 마시기엔 그간 먹은 것들도 없고 몸도 약해져서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님의 작업실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지만, 몸 상태도 그렇고 식사 내내 집중을 하지 못 했기 때문에 작가님께 많이 죄송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아마 그가 다른 사람과 가졌던 식사 자리 중에서 가장 지루한 식사시간을 보냈겠지..? 

     

     

    " 시형 씨, 전에 봤던 것보단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요. "

     

    " 아.. 신경 쓸 일이 많아서요.. "

     

    멍하니 작업실에 있는 의자에 앉아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자, 양손에 머그컵을 들고 있던 그가 왼손에 쥐고 있는 머그컵을 내쪽으로 내민다. 

    커피는 마시고 싶지 않은데..

     

    혹시나 해서 하얀 머그컵 안을 들여다보니 하얀 꽃이 둥둥 떠다닌다.

     

    꽃차인가..?

     

     

    " 몸이 안 좋아 보였는데.. 빨리 보내줄 수 있지만, 그래도 시형 씨랑 있고 싶어서 욕심부렸어요. 미안해요. "

     

    " 아녜요.. 저도 작가님이랑 같이 있는 거 좋아해요! 제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즐겁게 해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 

     

    " 몸만 안 좋은 것 같진 않은데.. 무슨 일 있었어요? "

     

    일어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그가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이더니, 그대로 무릎을 구부린 채로 앉아서 나를 올려다본다. 

     

    남들이 보기엔 정말로 로맨틱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정답이다.  

    그를 지금 마주하고 있는 나 조차도 나빴던 기분은 어디로 갔는지,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가끔 수열이도 나에게 쓰다듬을 받기 위해서 쭈그려 앉은 상태로 올려다 본적이 종종 있는데

    이권도와 수열이가 같은 포즈를 해도 서로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 같다..

     

    수열이는 예쁨 받고 싶어서 애교 부리는 강아지라면, 이권도는..

     

    " 나에게도 말 못 할 정도로 깊은 고민인가요..? "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면서 내 안에 있는 걸 끄집어내려고 기다리는 사육사 같다.

     

    말하길 주저하는 내 손을 잡고 천천히 쓸어주는 손길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모르는 척 나의 안부를 물어봐주고 식사 시간 내내 사소한 배려를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위로를 해주고 있었으니까.

     

    아니, 사실은 학원 앞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그의 존재만으로 위로를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진 모르겠지만, 내 안에 있는 걸 이 사람에게 털어놔도 될까..?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 아니라 호의에 의한 행동이라면..

    내 눈 앞에서 나를 다정하게 쳐다보고 있는 이 사람에게 내 아픔을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또 나락으로 떨어진다. 

     

    " 음.. 시형 씨, 고개 좀 들어볼래요? "

     

    " 네..? "

     

    내 앞에서 앉아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진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서 그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나 또한 시선을 움직인다.

     

    그가 발걸음을 멈췄던 곳은 다름 아닌, 들어오자마자 시선을 빼앗긴 그 사진 앞이었다. 

     

     

    " 사실 작업실로 불렀던 이유는 시형 씨한테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서 불렀어요. "

     

    " 선, 선물이요? 제가 초대받았는데.. "

     

    " 처음에는 이 사진을 주고 싶었는데. "

     

     

    그가 천천히 액자 모서리를 쓸어내리는 모습이 꽤 분위기 있으면서도 나른한 맹수 같아 보인다.

     

    " 이건 전시용 사진이기도 하고, 그래서 따로 인화해서 준비해놨거든요. "

     

    " 제.. 걸요? "

     

    " 이 사진 좋아하잖아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같이 봤던 사진이기도 하고 "

     

    그가 액자를 지나쳐 책상 위에 곱게 포장이 된 선물 박스를 쥐고 내게로 걸어온다.

    멀리서 봤을 때는 크다고 느껴지지 않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까 일반 초상화와 크기가 같아 보인다.

     

    " 자요. 받아요. "

     

    " 정, 정말로 절 위해서 준비.. 하신 거예요? "

     

    " 이 그림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도 아닌 바로 시형 씨였으니까요. "

     

    " 그, 그.. 제가 드린 건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데.. "

     

    " 언젠간 선물해주고 싶었어요. "

     

    내 손에 쥐어지는 선물 박스는 무겁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걸 받은 것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권도가 세심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자신을 챙겨주고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라서.. 

    어느 누구한테도 친절하게 대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진까지 따로 준비해놓고 나를 위한 환경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 닿자, 이젠 정말로 눈물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 흐으, 끅.. 윽.. "

     

    " 시형 씨..? "

     

    " 죄, 죄송해요.. 그게, 너무 좋아서.. 오늘 너, 너무 죄송했는.. 끅.. 데에 "

     

    " 울어요? 아, 이런.. "

     

    당황했는지 그가 주변을 둘러보곤 휴지를 발견해, 대충 손에 쥐고 돌아와 내 눈가를 닦아준다.

    그가 내 앞에서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로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다.

     

    어느 정도 눈물을 다 닦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꼭 안아주는 그의 돌발 행동에 온몸이 굳었지만, 뒤 이어서 내 등을 쓸어내리는 것을 보며 이 사람이 지금 날 위로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미안해요. 우는 사람은 한 번도 위로해본 적이 없어서. "

     

    " 잘, 하고 계시는 걸요.. "

     

    " 한 번도 남을 위로 차원에 안아준 적이 없어요.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건.. "

     

    등을 쓸어주던 손이 어깨를 잡고 품에서 나를 떨어트린다.

    그리고 곧 이어서 진지하면서도 다정한 미소를 품고 있는 그의 얼굴이 나를 마주한다.

     

    " 시형 씨가 위로받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

     

    " 작가님이 늘 다정하게 대해 주시는 걸요,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 작가님밖에 없어요. "

     

    " 그런 말 듣고 있으니까, 시형 씨한테 꼭 고백이라도 받는 것 같네요. "

     

    " .. 무, 무슨 소리하세요. "

     

    부끄러워서 차마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고개를 다른 쪽으로 획 돌려버렸다.

    억지로 내 고개를 부여잡진 않았지만, 내 앞에서 쿡쿡대면서 웃는 소리가 얄미워서 다시 앞을 보게 되었다. 

     

    " 왜, 왜 웃으세요.. "

     

    " 시형 씨, 나랑 만날래요? "

     

    " .. 네? "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지고 말았다. 

    지금 이권도 입에서 나온 ' 만나자 '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나에게 만남을 요구하는지 알고 싶었다. 

    비록 우리가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하는 태도에 설렌 적도 많고 그에게 의지했던 적도 많았다. 

     

    고백을 한다면 내 쪽에서 먼저 하는 게 정상적일 텐데..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이런 대단한 사람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걸까? 

     

    " 저랑.. 만나자는 의미가.. 혹시 "

     

    " 바쁘지만 시형 씨랑 가끔 연락하는 것도 즐거웠고, 시간을 내서 밥을 먹는 것도 즐거웠어요. 사실 여유가 생기면 개인적인 일을 하느라 다른 곳에 시간을 뺏겨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시형 씨를 만나고 나서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

     

    " 제가.. 작가님 생각보다 되게 좋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뭔가 장점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

     

    " 내가 했던 말들 중에서 시형 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

     

    " 아.. 그래도 작가님은.. 저보단 더 좋은 사람 만나셔야 할 텐데.. "

     

    " 시형 씨가 날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게 해요. "

     

    내 옆에 앉아서 나의 손을 잡은 채로 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으면서도, 머릿속에선 ' 감히 내가..? '라는 생각이 들어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 내가 시형 씨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

     

    ' 내가 조윤이랑 사귀었으면 좋겠어? ' 

     

     

    " 마음속에 두고 있는 사람이 없다면.. 나랑 만나줄래요? "

     

    ' 내가 형을 좋아하니까. '

     

     

    이권도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수열이의 목소리와 그때 상황이 겹쳐서 보였다.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고 그 호의에 응답해줄 수 있는 상황인가?

     

    수열이를 피하고자, 그리고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려고 이권도를 만나게 된다면.. 

    작가님에게도 실례가 될뿐더러, 홀로 남아있는 수열이는 어떻게 하려고?

     

    역시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만한 그릇이 아닌 것 같다.

    나에겐 너무 과분한 사람들이고, 너무 과분한 사랑이지..

     

     

    " 죄송해요 작가님.. "

     

    " 역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건가요? "

     

    " 그건..! 아니고요.. "

     

    " 그럼.. 왜 거절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

     

    " 제가 지금은 만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많이 별로인 사람이라.. 어려울 것 같아요. "

     

    " 시형 씨는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아요. "

     

    " 성격이 이래서 많이 힘드실 것 같고요. "

     

    ' 작가님이야 말로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하자 이권도 또한 나와 같은 말을 했다.

    나야말로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고, 서로 닮은 것 같으면서도 반대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잘 어울릴 줄 알았는데.. 라며 아쉬운 티를 내기도 했다.

     

     

    " 시형 씨. "

     

    어느 정도 울음이 그쳐지고 머쓱한 마음에 신고 있던 운동화의 발끝을 맞추며 동동거리고 있는데, 진지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이권도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사람 심장 떨리게.. 

     

    " 네? "

     

    "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나누는 기준은 누가 결정하는 거죠? "

     

    " 없죠.. 하지만 제 스스로가 늘 저에게 모질게 대하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

     

    " 아마 그 기준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해도, 곁에서 남을 위해 울어주는 시형 씨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 

     

    오늘 하루 종일 나를 울리려고 작정을 하기라도 했는지 또다시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앞으로 이런 사람에게 사랑받고 확신을 받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 

     

    " 사실 저는 우는 사람 달래는 법을 잘 몰라요. 안아주면 된다는데 그건 내 옷이 더러워지고, 칭얼대는 걸 들어줄 여유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

     

    그런 사람이 내가 울자마자 휴지를 들고 와서 눈물을 닦아주고, 품에 안아서 토닥여주기까지 했다. 

    처음부터 계속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있고, 그렇게 대해주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니..

     

    " 근데 시형 씨라면 괜찮은 것 같아요. 아니, 오히려 좋아요. "

     

    또다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분명 눈물이 나올만한 상황이 아닌데, 그가 해주는 말 한마디에 눈물이 자꾸만 터져 나온다. 

     

    울고 싶지 않아서 입술을 꽉 깨물고 두 눈에 힘을 주고 있는데, 이권도는 이번에도 놓치지 않고 맨손으로 내 얼굴을 닦아준다.

     

    " 원래 드라마 같은 거 보면 지금 키스해야 하는데, 그렇죠? "

     

    " 푸흐.. "

     

    농담을 건네는 이권도 덕분에 눈물이 쏙 들어가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 사람 덕분에 울고 웃고, 내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 사람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 우선 차였다고 생각해야겠네요. "

     

    " 그게 아니라.. "

     

    "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는 거 보면 내가 마음에 드는 건 맞는 것 같은데. "

     

    " 작가님 싫어할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딨어요.. "

     

    " 있죠. 가령 우리 시형 씨 옆에서 따라다니는 동생도 날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

     

    " 수열이요? 그럴리가요.. " 

     

    수열이가 작가님이랑 마주쳤던 적은 공원에서 만났던 날 이외에는 없었는데..

    수열이 본인이 작가님에 대해서 언급했던 적도 없고.. 

     

    그리고 수열이가 대놓고 누군가에게 불쾌함을 드러낼 사람... 인가?

     

    잘 모르겠다. 

     

    최근 들어서 수열이의 얼굴이 어두웠던 것 밖에 보지 못 했으니까.. 

     

    사실은 내가 알지 못하는 모습들이 존재할 수도 있는 거고..

    앞으로 내가 평생 보지 못할 모습들도 존재하겠지.

     

    " 시형 씨는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많지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무심한 것 같아요. "

     

    " 제가요? "

     

    " 내가 뭘 좋아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으면서, 내가 시형 씨 좋아하는 건 지금까지 몰랐잖아요. "

     

    직접 말을 안 해주면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고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엄청 답답하게만 느꼈는데..

    그 분류에 나도 포함이 되는 사람이었구나..

     

    " 직접 좋아한다고 말을 안 하면 잘 모르잖아요.. 게다가 작가님 같은 사람이 절 좋아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

     

    " 왜 말이 안 되는데요? 시형 씨 정도면 완벽한 이상형이지. "

     

    "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

     

    " 왜요? 조금만 더 하면 넘어갈 것 같아요? "

     

    " 아, 진짜 작가님.. "

     

    답지 않게 자꾸만 얼굴을 들이대며 질문 공세를 하는 이권도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좀 저리 갔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고개만 돌리면 이권도의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고개와 시선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 ... ! '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들썩이며 시선을 피하니 이권도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 왜 자꾸 틈을 보이지? 파고들고 싶게. " 

     

    저렇게 능글맞은 사람인지도 몰랐는데.. 

     

    그래도 오늘 하루 이권도와 함께 보내면서 우울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이 사람이 나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 내가 수열이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사람과 연인 사이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 많이 늦었네요. 자고 갈래요? "

     

    " 아녜요.. 작가님도 쉬셔야죠. "

     

    " 다음엔 꼭 자고 가면 좋겠네요. "

     

     

    내가 두르고 온 목도리를 목에 걸어주고 뒷머리를 쓸어준다.

    처음에는 그냥 호의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말하는 자고 가라는 말의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작가님이 나를 욕심내는 만큼 나 또한 그에게 욕심이 난다.

     

    연인 사이는 항상 끝이 보일 수밖에 없는 불안한 관계니까.. 

    부디 그가 마음을 정리하고, 친구처럼 지냈으면 하는 그런 이기적인 욕심이 든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관심을 받고 사랑받는 느낌이 좋아서 혼란스럽다. 

     

    " 시형 씨. "

     

    " 오늘 감사했어요. "

     

    " 나랑 보냈던 시간 동안 나에게만 집중하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또 그런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보내기 싫어지잖아요. "

     

    아쉬웠던 것은 맞으나..

    그게 얼굴에 드러날 정도였나?

     

    " 작가님과 보냈던 시간이 정말로 행복했으니까요. "

     

    " 다음에 또 초대할게요. "

     

    " 다음에는 제가.. 대접해드릴게요! "

     

    나를 바라보며 웃어주는 이권도가 한없이 다정하다.

     

    작업실에 들어오는 입구까지 나를 데려다주던 이권도가 갑자기 제자리에서 멈춰 선다. 

     

    지잉 - ♪ 

     

    " 아, 잠시만요. "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곧이어 그가 전화를 받는다. 

     

    이렇게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전화가 오는구나.. 

    역시, 오늘도 바빴을 텐데 일부로 시간을 내어서 만나 준거고.. 

     

    멀리서 그의 통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권도가 통화를 다 끝낸 건지 나에게 걸어오고 있다.

     

    " 미안해요 시형 씨.. 오늘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지금 이 시간에 손님이 오신다고 하네요. "

     

    " 괜찮아요! 많이 바쁘셨을 텐데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

     

    " 집에 조심히 들어가고, 연락 줘요. "

     

    매일이 바쁜 사람인데 내가 너무 욕심을 낸 것 같기도 하고.. 

    손님이 오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해 줘야겠다 싶어서 발걸음을 재빠르게 옮겼다.

     

    이권도의 작업실이 다른 건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 즈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 이권도 나 거의 다 왔어. "

     

    저번에.. 이권도와 약속이 있었을 때, 당일 날 취소당해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봤던 사람이잖아?

     

    " 작업실로 오지 말고 주변 호텔 가서 방을 잡으라고? 너 되게 고인력 함부로 써먹는다? "

     

    저 사람과 지금 통화하고 있는 사람이 작가님과 동명이인일 수도 있는 거고.. 자세하게 듣고 싶지 않으면서도 저 통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호텔에 가서 방을 잡으라는 건 그냥.. 마땅히 이야기할 곳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저 사람과 저번에도 만났으니까.. 둘이서 만나기에 적합한 장소가 호텔일 수도 있는 거겠지.

     

     

    웃으면서 날 보내줬던 이권도가 스쳐 지나갔지만, 주먹에 쥐어진 힘은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욕심내지 않겠다며, 후회하지 않겠다며.. 

     

    스스로 지금 뭘 질투하고 있는 건데.. 

     

    " ... 가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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