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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착각 하고 있었다.B망상연재게시판/사랑하는 방법에 대하여 (조아라) 2021. 2. 12. 14:30반응형
집에 들어오자마자 샌드위치가 구겨지는 건 상관도 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종이 가방을 던지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다짐했던 건 나 자신이었는데, 수열이가 좋아하는 대상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에 왜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오직 나만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주 조금이지만, 그 감정선이 연애가 아니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생각했는데..
나 스스로가 수열이를 동생 이상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걸 알아차린 것과 동시에 난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알아버렸다.
난 그에게 그저, 형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우리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내 마음을 알아차려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의 사랑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는 게 현실이다.
" 하아.. 하아.. "
진정이 된 줄 알았던 숨이 다시 차올라 목구멍이 막혀버린 것 같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겨우 냉장고 앞으로 나와서 생수병을 하나 집고 물을 마신 뒤에야 숨이 진정되었다.
" 윽, 흐.. "
나와 눈을 맞추고 입을 맞췄던 수열이를 피하고,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점점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 가고 있는 나를 무서워하고 피해야 했었다.
하지만, 나는 수열이를 피할 수 없는걸..
언제나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또한 나를 믿고 나를 계속 기다려 줄 것이다.
착한 수열이라면, 그리고 나를 따르는 수열이라면 분명 그럴 테니까.
할 수만 있다면 아무 나도 좋으니 채워져 있는 이 마음을 비워주고, 수열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 분명, 이런 모습을 보면 실망할 테니까.. "
수열이 앞에서는 절대로 티를 내서는 안된다.
될 수 있으면 나 혼자서 조용히 마음을 접고, 그가 바른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사랑받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어렴풋이 술을 마시면서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훌쩍 거리는 수열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게서 욕심을 버리는 일은 쉽다.
그것을 아예 탐내지도 않으면 되는 것이고,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눈길을 떼는 것은 쉬운 일이다.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수열이를 마주치고, 그가 하는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것이 이제부터 내가 지켜야 할 선이자,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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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을 하고 난 이후에 수열이에게 적극적으로 연락을 했다.
자주 보면 더 못 잊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가 내 동생이고, 내 또 다른 가족이라는 인식을 계속 새겨 넣으니 마음이 조금씩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사실 정리가 되는 게 아니라 억지로 그를 동생으로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가끔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던가, 옷을 벗어준다던가, 나를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심장이 아려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성이 생기듯이 아무렇지 않게 수열이가 하는 행동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나와 수열이의 관계에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아주 조금이라도 내 마음의 변화가 있었으면 한다.
홀로 생각에 빠져 앞에 놓여있는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휘젓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성백이가 갑자기 질문이 있는 학생처럼 손을 들어 보인다.
그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니 익숙하다는 듯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성백의 모습이 동생 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 형, 저 고민이 있는데요.. "
" 응? 무슨 고민? "
" 요즘 학원에 가끔 아르바이트하러 가는데, 입시라서 그런지 학생들 멘탈이 약해져서 좀 곤란해서요. "
" 그렇긴 하지.. 자존감이 제일 떨어져 있을 테니까. "
" 제가 감정의 변화를 잘 알아차리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예 티도 안 내고 입도 안 여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힘들더라고요. "
" 아마 생각도 많아지는 시기라서 그럴 거야.. "
처음 학생들을 만날 때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수업을 통해서 성적이 오르고 자신감을 되찾다가도 시간이 지나서 정체되는 구간에 도착했을 때 낙담하는 학생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런 학생들을 이끌고 다시 힘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건 가족들의 영향이 제일 크지만, 그걸 못해주는 가정이 많았기에 대부분 학원에 와서 우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 학생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열고 다시 도전하는 학생들을 보고 나 또한 위로를 받았으니까..
" 이야기 잘 들어주고,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말해줘. 그 시기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
" 그래도 너무 어려워요.. 그냥 잘하고 있다는 말을 해도 시큰둥하고.. 어쩔 수 없는 거겠죠? "
" 힘든 시기에 혼자 나아가는 게 아니라 함께 나아간다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계속 지켜보는 거지, 서로가 믿음이 생기는 게 한 순간은 아니니까.. 언젠가는 마음 열고 다시 나아갈 수 있을 거야. "
그는 내가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꽤 깊은 고민에 빠져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누구나 낙담하고 혼자라고 생각되는 삶을 살아봤을 것이다.
외로운 싸움이라고 생각했을 때 결코 그 싸움이 홀로 맞서서 싸우는 게 아니라, 곁에 든든한 아군이 있다는 것을 새겨주고, 그 마저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끝까지 곁에서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아주 작은 위로가 될 때가 나에게도 있었으니까..
모두가 아프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 사람들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게 욕심이면서도 소원인 걸 어쩌겠어..
" 말 잘못 꺼냈다가 많이 힘들어할까 봐 조심스럽네요.. "
" 나도 아직까지 매몰차게 말을 못 하겠어.. 성장하기 위해서 다치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익숙하지도 않고 익숙해져서도 안 될 것 같아서.. "
" 그래도 형은 상처 받는 일에는 뭔가 익숙할 것 같아요. "
" 내가? "
" 형이 상처 주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면, 상처 받는 일에도 익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성백이가 무뚝뚝하게 말하고 있지만, 말의 의미는 분명 위로라는 것을 알았다.
생각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대상에게 위로를 받아버린 것 같아서 코 끝이 찡해지더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곧이어 성백이의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표정을 보고 나서야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처 받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속앓이 아닌 속앓이를 했었나 보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 미, 미안..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니까 놀래서 "
" 울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
" 아냐, 오히려 위로해줘서 고마웠는 걸.. "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가 건네는 티슈로 눈가를 살며시 꾹꾹 누르면서 눈물을 닦고 있는데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내 옆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져 확인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자마자 깜짝 놀랐다.
" 수, 수열이? "
" 너, 뭐야? "
그때 도망치듯이 자리를 벗어난 이후에 수열이를 만날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를 마주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뭐가 그를 화나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인상을 찌푸리며 성백이의 멱살을 잡고 있는 그를 말리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 둘 사이에 있는 빈틈을 파고 들어서 그들을 떨어트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꿈쩍도 하지 않는 그를 억지로 떼어놓고 성백에게도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상황을 정리하려는데,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많이 화가 난 상태로 나를 바라보는 수열이와 눈이 마주쳤고 그대로 그의 눈을 피해버렸다.
" 형.. "
" 수열아 이쪽은 최근에 같이 다니는 후배 성백이고, 성백아 이쪽은 수열이야. 첫인상이 좋지 않았지만 서로 소개해주고 싶었어. "
어색한 상황에서 오해를 풀어보려고 해도, 서로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 형.. 괜찮아? "
" 성백이랑 아무 일 없었어, 그냥 이야기하다 보니까 눈물이 나온 거야. "
" 무슨 이야기 했는데? "
" 그.. "
" 나쁜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는데, 남의 이야기를 굳이 들을 필요가 있나. "
정확한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곤란했고 그리고 그 수많은 이유들 속에 수열이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대답을 피할 수 없게 눈빛으로 날 몰아세우는 수열이에게 성백이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수열이의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정말 별 일 없었어, 요즘 힘들었는데 성백이가 위로해줘서 그런 거야.. 일도 다니면서 좀 약해진 것 같아. "
" ... 나한테 말해줄 수 있었잖아. "
너도 힘들어 보였는데 어떻게 말해.
네가 날 먼저 밀어내는 것 같았는데, 내가 어떻게 너에게 말을 해..
내가 흔들려서는 안 되는데 그 마음을 다 어떻게 너에게 털어내?
" 별 일 아니니까.. 그리고 너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알아서 하려고 했지. "
" 그럼, 나한테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형한테는 별 일이 아닌 거야? "
"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
수열이가 하는 말에 상처를 받아서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지만, 어째서인지 말을 꺼낸 수열이가 더 슬퍼 보여서 울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를 안아주고 그런 나쁜 생각 따위 하지 말라고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 시형이 형, 우선 화장실 다녀와요. "
" 응.. 알았어. "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성백이가 나를 화장실로 보내고 수열이와 성백이만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거울을 바라보니 눈물 자국이 남아있지 않지만, 붉게 물들어 버린 눈가와 엉망이 돼버린 표정은 남들이 보기 좋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화를 나누지도 못할지언정, 서로가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있으니.. "
수열이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민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알아서는 안 되는 마음이라고 생각했기에 말을 하지 않았는데 수열이는 달랐던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본인에게 말해주길 바라고 내가 먼저 입을 열어 말해주길 바란 것이다.
아마도 이 마음을 수열이가 알게 된다면, 말을 못 한 것보다 더 못할 상황이 와버릴 테니까..
그래도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칭할 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너란 존재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큰 존재라서 문제인걸..
대충 얼굴을 씻어내고 화장실에서 나오니 수열이와 성백이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대화라도 나눈 건지 서로 무뚝뚝한 상태로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니 오해가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다.
" 형 왔어요? "
" 응응.. 많이 기다렸지? 근데, 수열이는 여긴 무슨 일이야? "
" 그냥 지나가던 길인데 형이 보여서... 형 많이 힘든 건 아니지? "
" 괜찮아. 오히려 우리 수열이가 많이 놀랜 것 같아서 미안하네.. 그리고 성백이도 미안해. "
" 그걸 왜 형이 미안해해요. 쟤가 착각한 건데. "
무슨 대화를 했는진 모르지만, 말을 놓는 거 보니까 서로 친구로 지내기로 한 건가..?
둘이 친하게 지내면 나야 다행이고 좋지..
" 둘 다 내가 아끼는 동생들이니까, 이렇게 만난 거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
" 난 형이랑 먹고 싶은데.. "
" 전 괜찮아요. "
나랑 단 둘이서 먹고 싶다는 수열이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짐을 정리하는 성백이와 그런 성백이를 째려보고 있는 수열이가 귀엽게 보인다.
오랜만에 만났기도 했고, 그런 일이 있는 이후에 수열이 보기가 어색할 줄 알았는데.. 성백이 덕분에 그와의 거리감을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주 조금.. 안심을 느꼈다.
카페에서 나와 가까운 식당에 가서 주문을 시키고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수열이의 근황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나랑 주말마다 공부를 못하게 될 것 같다는 말과 본가에서 체대 입시 준비를 하는 학생들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가끔 일을 하러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들을 수 없었다.
물론 알게 된지 얼마 안 된 성백이 앞에서는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그 당일에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은 네 사랑에 보답을 받고 있는 건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들어야만 내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요즘은.. 만나는 사람은 없고? "
" 그걸 왜 물어봐? "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와버렸을 때 당혹함은 누구나 겪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대상에 따라서 웃어넘길 수 있지만 내 앞에 있는 수열이는 그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수열이의 굳어버린 목소리처럼 내 몸 또한 굳어버리고 말았다.
" 예전에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들었던 것 같아서... 요즘 얼굴 보기 힘들어서 애인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
" 연락은 매일 했어. 오히려 형이 바빠서 연락 빈도가 줄어들었고, 형이 바빴으니까 찾아가고 싶어도 못 찾아간 거지. "
" ... 그랬지 미안.. "
괜히 이야기를 꺼내서 또다시 수열이에게 상처를 준 것 같다.
어색한 정적 사이에 밥이 나왔고, 앞에 놓여 있는 나물을 내 쪽으로 두고 수열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그의 앞으로 바꿔주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형.. 나 이제 이거 못 먹어. "
" 어? "
" 예전에는 잘 먹었는데, 체질 변하면서 알레르기가 생겼어.. "
" 예전에는 엄청 좋아했는데.. 못 먹어서 많이 아쉽겠다. 그럼 이건 내가 먹을게. "
" 형이 항상 나한테 양보해준다고 적게 먹었잖아. "
" 난 형이니까 양보해주는 게 당연했지. "
" 맞아, 그래서 양보받는 게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나 봐. 난 누구에게도 내 걸 빼앗기는 게 싫었거든.. "
늘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수열이 앞에 놓고, 수열이가 더 먹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양보해줬던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못 먹어서 욕심이 나거나 질투가 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수열이가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다.
지금은 좋아하는 것을 못 먹는다는 말에 많이 안타깝고 속상했지만, 그래도 다른 음식들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고 있으니 옆에서 성백이가 살며시 숟가락을 들며 내게 묻는다.
" 밥 먹어도 될까요. "
" 어..?! 먹어, 먹어! "
괜히 나랑 수열이 때문에 밥을 먹지도 못하고 가운데에 껴서 애매한 대화를 듣고 있느라 아무것도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해진다. 맛있게 먹는 모습들을 지켜보고, 계산까지 마치고 가게에 나왔을 때는 이미 8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성백이는 다음 날 출근을 위해서 집에 일찍 들어갔다.
매번 성백이를 만날 때마다 날 데려다 주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에 앉아 성백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오늘은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수열이를 말리지 못하고 결국 함께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 여기서 집까지 25분 정도 걸리는데 괜찮겠어? "
" 응.. 형이랑 같이 걷는 거 좋아해. "
" 오랜만에 둘이 같이 있는 것 같네. "
" 형. "
" 응? "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고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손을 잡고 같이 걸어가자는 의미인 것 같아서 그의 손을 꽉 잡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찬바람이 손등을 스쳐 지나갔지만, 손이 시리지 않았다.
오히려 꽉 잡고 있는 손에서 땀이 날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잡고 있는 손을 놓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랜만에 손 잡는 것 같다. "
" 어렸을 때는 항상 형 손 잡고 걸어 다녔는데. "
" 내가 걸음 조금만 빨라도 너 징징거렸잖아. "
" 그땐 형이 진짜 빨랐거든? 보폭도 엄청 넓어서 따라잡으려고 얼마나 힘을 주고 걸었는데.. "
" 푸흐.. "
당연하겠지만 어렸을 때는 내가 수열이보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길어서 늘 걸을 때마다 걸음 차이가 많이 났었다.
그때마다 졸졸 따라다니던 수열이가 내 걸음을 따라잡지 못해서 달려오던 날도 있었고, 최후의 수단으로 손을 잡고 걸어갔지만 그것 또한 수열이에겐 버겁게 느껴지던 날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다.
내 보폭이 수열이보다 느렸으면 더 느렸지,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는 나의 걸음에 맞춰 그가 함께 걸어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 수열아.. 이제 집으로 "
지잉 - ♪
추운 날씨에 많이 걸어왔기도 했고, 더 걸으면 둘 다 감기에 걸릴 것 같아서 수열이를 보내려는 순간, 그의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울리는 핸드폰을 무시하는 그에게 전화를 받으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는 수열이를 보며 걸어가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 형! 저 형 집 앞인데.. 저번에 옷 빌려주신 것도 있고, 가져다 드리고 싶어서요. '
" 괜찮아. 그냥 가져. "
' 그래도.. 형 얼굴 보러 왔는데.. '
" .. 그럼 금방 갈게 추우니까 골목 안쪽에서 기다려. "
전화를 끝마치고 한숨을 푹 내쉬는 그의 모습을 보고 혹시나 귀찮게 하는 사람이 생긴 건가 싶어서 걱정이 든다.
목소리는 남자 같았는데..
설마, 저번에 집 앞에서 본 그 남자인가..?
" 집으로 가야 해? 형이 데려다줄게. "
" 아냐, 택시 잡아줄 테니까 그거 타고 가. "
" 괜찮아 시간도 많고, 나도 너 데려다주고 싶었거든! "
" 그럼 저기 앞까지만 데려다줘 "
그가 데려다 달라는 곳까지 데려다주면, 골목을 틀어서 얼마 가지 못해 수열이의 집이 보일 것이다.
그러면 수열이를 기다리고 있는 그 남자가 누군지도 알 수 있을 테고.. 그냥 끝까지 데려다준다고 할까..?
고민 속에서 수열이를 데려다 주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데 얼마 가지 못해서 걸어가고 있는 방향 맞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혀어엉! "
전화기 너머로 들렸던 목소리다.
그리고.. 그때 수열이의 집 앞에서 봤던 남자였다.
" 왜 안 기다리고 직접 나왔어? "
" 형 기다리기보단.. 형이 올 것 같은 곳으로 걸어가면 형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
수열이를 마주 보면서 활짝 웃는 남자..
미소가 너무 해맑고 밝아서 남자인 내가 봐도 귀엽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수열이를 대하는 행동이 마치 선후배보다는 정말 애틋한 사이처럼 보여서..
그 앞에서는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여서 묘한 감정이 일어난다.
" 안녕하세요. "
" 아, 안녕하세요! 조윤입니다! "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쑥스럽게 인사를 전하는 모습에서 귀엽다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묘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수열이를 너무 좋아한다는 티를 내고 있어서 그런 걸까?
수열이가 사랑받는 것은 좋은 건데..
맞아, 저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데 나는 수열이를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불편한 것 같다.
나는 수열이를 그저 동생으로만 바라봐야 하고, 저렇게 사랑한다는 티를 낼 수 없는 위치니까..
" 수열이한테 이렇게 귀여운 동생이 있는 줄 몰랐네요. "
" 헤헤.. 제가 형을 많이 좋아하고 있거든요. "
" 아.. 수열이는 좋겠.. "
아무렇지 않게 수열이를 바라보며 좋겠다는 말을 건네려고 했는데 그의 표정을 보고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조윤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게 기분이 나쁘지 않는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담고 있다.
그를 마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가 맞잡고 있는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조윤 때문에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빠져야 하는 자리구나.
" 오늘 우연히 아는 동생들이랑 밥을 먹게 되어서, 수열이랑도 밥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동생이랑 같이 가면 되겠네. "
손에서 힘을 풀고 손을 놓자 그 무겁던 손이 쉽게 빠져나간다.
내가 미련을 가진 채로 그를 잡고 있어서 그렇지, 내가 미련을 버린다면 예전처럼 편안한 관계로 돌아오겠지.
" 형..? "
" 좋은 시간 보내고, 나중에 연락할게! 조윤 씨도 나중에 또 만나면 좋겠네요. "
" 네! "
이상함을 감지한 건지 당황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수열이를 뒤로한 채, 또다시 그들에게서 벗어 나왔다.
우리가 가까워지는 것은 오직 가족과도 같은 관계일 뿐이지, 우리 사이에 변화란 없는 거야.
조윤과도 같은 사랑을 품지 못한다면, 나는 나만의 사랑을 품고 그에게 전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 위치가 연인의 위치가 아니라 가족과 보호자로서의 위치라고 해도..
그것 또한 사랑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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