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폭상팔 2021. 4. 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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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제로 이루어진 에리카의 바 안에서 잔잔한 재즈가 흐르고, 바 테이블 가운데에 바텐더가 주는 잔을 손에만 쥐고 있는 채로 이권도가 앉아있다.

 

그에게 다가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와 안면이 있던 사람들은 늘 그의 곁을 떠도는 창경 때문에 불편해서 쉽게 다가가질 못하고 멀리서만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그때, 갈색머리를 한 남자가 자신 있게 이권도가 앉아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한참 동안 대화를 이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 오늘은 저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는 건가? ' 싶어서 시선을 거두려고 하자마자, 갈색머리의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를 나간다.

 

 

" 이권도.. 너 때문에 손님들 다 도망가잖아. "

 

" 내가 뭘? 자기 싫다고 말했을 뿐인데, 너도 봐서 알잖아. "

 

" 맞긴 하지만.. 야 사람 면전에 대고 싸 보인다고 하면 어떡하냐! "

 

" 싸 보이게 행동을 하니까 싸 보인다고 하지. "

 

"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

 

일? 

 

일이야 항상 있었다. 

 

별 의미도 없는 자리에 가서 얼굴을 비추느라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볼품없는 작품을 들을 가지고 와서 한 번만 내 이름을 팔아서 홍보를 해달라고 했던 놈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대응 하는 것도 귀찮고, 짜증 나고, 번거로워서 늘 웃으면서 대응해줬더니..

아예 기어 오르려고 하는 것들 때문에 이 직업에 환멸까지 나고 있는 와중에, 곁에서 내 화를 풀어줄 사람이 없어졌다.

 

 

민시형.

 

그와 저녁시간을 가진 이후로 연락이 점점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바빴고, 그도 바빴으니.

그리고 그와의 연락에 굳이 집착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연락을 피하는 경향을 대놓고 보일 때마다 내 안에 있는 틀이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그에게 실수를 했던 적이 있는가? 

그에게 너무 가식적으로 보이려고 했던 것인가?

혹여나 다른 사람과 다른 곳에서 있던 모습을 봤나?

 

평소의 행실이 올바른 편은 아니지만 대중적인 자리에서는 조심스럽게 행동하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될 때가 많았다.

 

그걸 지금 민시형에게 보였던 것일까? 

 

이러한 물음 끝에 떠올랐던 것은 '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내가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 는 것이다.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게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요즘 이창경도 다쳐서 안 오고, 오랜만에 얼굴 보는 이권도는 바에서 사고나 치고.. "

 

" 분명 말하지만, 사고가 아니라고 했다. "

 

" 창경이 다친 이유는 알아? 아니, 너네 연락은 하니? "

 

" 내가 왜 알아야 하고, 왜 연락을 해야 하는데? "

 

 

대놓고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나도 똑같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봐줬다.

 

내가 왜 창경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지? 

 

안 그래도 민시형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아서 신경 쓰이는데, 저런 일에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없지.

 

" 저번에 너랑 같이 다니는 사람 꼴 보기 싫어서 한대 치다가 오히려 더 쳐 맞았다는데? "

 

" 하아.. "

 

" 창경이가 예전부터 너 좋아했잖아, 그래서 너한테 귀찮게 구는 사람들 다 처리하고 다녔던 건 알아? "

 

" 알고 있어. "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곁에서 귀찮게 하는 놈들을 일일이 직접 상대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고 생각했고, 이창경이 미친놈이라는 사실이 퍼지고 나서는 쉽게 다가오는 녀석들도 없어졌으니까.

 

편하게만 생각했는데, 근데 요즘 내가 만나는 사람이 누군 줄 알고.

 

 

" 요즘 만나는 사람이 누군 줄 알고 처리를 하고 다니는 거지? "

 

" 저번에 노란 머리랑.. 그, 네가 자주 이야기했던 그 사람? "

 

" .. 민시형? "

 

" 그 사람 이름이 민시형이야? 어쩜 이름도 귀엽다. 아, 하여튼 그 사람 마음에 안 든다고 2주내내 까고 다니다가 윽..! "

 

" 손댔어? "

 

그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움켜 잡았다.

 

곧이어 손에 쥐고 있는 글라스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파편이 튀자, 모든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본다.

 

남들이 쳐다보든 유리 파편이 떨어지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 이, 이권도 잠깐만 유리 파편 위험하다고!" 

 

" 이창경이 손댔냐고!!! "

 

" 그 사람 건들다가, 다른 사람이 와서 말렸다고 했어. 그리고 급하게 도망가느라 병원도 못 가고 여기로 왔.. 윽!! "

 

" 에리카! "

 

쥐고 있던 손목을 거칠게 놓자 바 테이블로 에리카의 애인이 뛰어 들어온다.

 

그녀가 다친 곳은 없는지 허둥지둥 대며 주변을 살펴보다가 나를 째려본다.

 

" 이창경은. "

 

" 몰라.. 이권도. 너 지금 많이 흥분했어, 주변에 사람도 많아. 진정해. "

 

" 하아.. "

 

감정에 지배를 당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그리고 이토록 더럽고, 화가 치밀러 오르는 건 더더욱 오랜만이다. 

 

이창경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지금까지 연락이 뜸했던 거라면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직접 물어보면 되는 걸

왜 숨기면서까지 나와 멀어지려고 하는 거지?

 

날 보면서 좋아한다는 티를 내놓고, 다른 사람이 한 번 으름장 놓으니까 금방이라도 도망을 가? 

 

어려운 사람이고,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토록 잡기 어려울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잡고 싶고, 다시 되돌리고 싶었다.

될 수 있으면 내 곁에서, 늘 내 눈 앞에서만 있게 하고 싶어 졌다.

 

그 사람이 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삶을 살아가면서 이익을 볼 수 있는 관계는 아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나에게 여러 가지를 안겨줄 수 있는 가치를 가진 사람임을 확인한 이후엔 더더욱 놓치고 싶지 않아 졌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닐지라도, 그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고 느낀다면..

 

이것도 남들이 말하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 이창경 여기로 오면, 나한테 당장 연락하라고 해. 그리고 용기가 없으면 아예 연락도 하지 말고 평생 내 앞에서 나타나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살아가라고 전해줘. "

 

" 너..! "

 

" 뭐? "

 

" 너 진짜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

 

" 간다. "

 

" 진, 진짜? 미친!! 이권도가 드디어 봉 잡힌 거야?! "

 

에리카의 엉뚱한 말에 대답해줄 가치도 느끼지 못해서 자리를 뜨기 위해 일어서자, 에리카를 부축하고 있던 그녀의 애인마저도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 

 

 

" 다음에 데리고 와! 알겠지? "

 

아마, 민시형과 함께 이 곳을 오게 된다면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맛있는 술을 몇 모금 먹이면 그때서야 경계심 없는 얼굴로 활짝 웃으며 ' 작가님~ ' 하고 날 바라볼 것만 같다.

 

생각하니까 더 보고 싶고, 나와 이야기할 때마다 수줍어하는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진다. 

 

 

" 그 사람이 오고 싶어 하면. "

 

" 와.. 이권도 생각보다 로맨틱한 사람이네? "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거리로 나와 무작정 민시형이 일하는 학원으로 향했다.

 

주말에도 일을 한다고 했으니, 7시면 한참 학생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라 생각되어 학원으로 향했고, 도착하자마자 그가 일하는 학원에서 그에 대해 좋은 소식을 듣지 못했다.

 

" 민쌤이요? 입원한 지 좀 지났는데.. 사고를 당했다고 하셨어요. "

 

" 세상에, 저분 유명한 작가님 아니세요? "

 

" 유명한 작가님이셨어? 난 모델인 줄 알았잖아.. "

 

민시형과 관련된 대화를 제외하곤 영양가 없는 대화라고 생각했지만, 그와 관련된 사람이기에 구겨지려는 미간에 힘을 주고 최대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학원을 빠져나왔다.

 

현재 그가 입원해있는 병원이 어딘지도 모르고, 어떠한 증상으로 입원을 했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그를 만나러 간다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나를 경계하고 있는 민시형을 또 마주해야 하고, 게다가 내 주변 사람 때문에 화를 입은 상태라 그의 경계는 최고조를 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 여보세요. "

 

" 궁금한 게 있어서 연락했는데. "

 

" 예? 저한테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선배님께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만한 게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 시형 씨가 어디 있는지 넌 알 것 같아서 연락했는데. "

 

핸드폰 건너편에서 윤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제대로 찾은 것 같긴 하지만 쉽게 그가 있는 곳을 알려줄 것 같진 않다.

 

" 시형 씨랑 오해가 생겨서, 당사자를 직접 만나야 하는 일이라 그러는데 도와줄 수 없나? "

 

" 당사자는 아무도 만나지 않길 원하고 있어서요. "

 

" 만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이야기라, 정말 못 알려주는 건가? "

 

" 그러게 있을 때 잘하셨어야죠. 평소 선배님 하는 행실이 곱지 않다고 생각은 들었는데.. 애초에 둘을 마주치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

 

지금 당장 그녀의 비아냥에 반박을 하고 싶지만, 그녀의 성격상 내가 반박을 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낸다면 시형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단 한 번도 남에게 굽혀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늘 사랑 때문에 약해지고 구차해지는 사람을 보면 꼴사납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이 꼴사납다기 보단 간절함이 전해져서, 얼른 그 사람에게 있는 곳으로 닿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 .. 정말, 정말로 마지막이라도 괜찮으니까. "

 

" 하아.. 죄송하지만 선배님..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정말로 없어요. 시형이가 저한텐 연락만 남기고 정말로 사라졌거든요. " 

 

" 연락처는? "

 

" 기존에 있는 번호랑 다른 연락처로 연락을 하긴 했지만, 이게 시형이 번호인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

 

" 그거라도 알려줘. 억지로 만남을 가진다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테니까. "

 

" 싫은데요. "

 

 

 

 

뚝 -

 

당연스럽게 번호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꺼진 통화에 어이가 없어서 핸드폰을 째려보자 

 

잠시 후 꺼진 화면에 다시 빛이 들어오더니 문자 알람이 뜬다.

 

' 010 - xxxx - xxxx ' 

 

' 고맙다. '

 

' 민시형 번호 아닌데요. 제가 선배님이 뭐가 좋아서 바로 줘요? '

 

 

그녀가 예전부터 나에게 대놓고 호의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업을 할 때 항상 능력을 우수하게 평가해줬던 때가 떠오른다.

 

솔직히 볼품없는 작품들을 아무 생각 없이 들이대는 놈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주제를 알고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적당히 최선을 하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어서 칭찬 몇 번 해줬던 게 이렇게 좋은 결과로 다가올 줄 알았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좀 더 잘해줄 걸 싶다가도.. 

 

 

" 쓸모없는 싹을 키울 필요는 없지. "

 

다시 냉철하게 앞에 다가올 상황들을 정리해보면, 머리와 가슴이 식어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내 상황을 정리하기보단 하루빨리 그에게서 멀어져 가는 이 틈을 좁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가 건네준 번호로 전화를 해봤지만, 역시나 받질 않았고 혹시 몰라서 문자를 남겨보기도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는 것을 보아 마음먹고 어딘가로 도망을 갔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학원에 혹시라도 다시 찾아갔나 싶어서 학원에 연락을 해봤지만, 민시형이 직접 학원을 방문할 수 없는 상황이고 전화로 학원을 그만둔다고 연락을 받은 상태라고 전했다. 

 

돈을 쓰고, 수소문을 해서라도 그가 어디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테지만, 그렇게 그의 숨통을 조여 버린다면 나에게서 더 멀어질 것을 알고 있기에..

 

 

그가 맨 처음 나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속도에 맞춰, 차근차근 다가가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 시형 씨, 할 이야기가 있어요. '  1

 

' 시형 씨, 밥은 먹었어요? ' 1 

 

' 오늘은 많이 춥네요. 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입고 다녀요. ' 1

 

' 시형 씨.. 내가 오해를 풀 수 있도록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 ' 1 

 

 

그가 문자를 보지 않아 남는 표식들을 하루하루 마주하며 처음에는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반복되는 무관심이 마치, 벽에 메아리를 외치는 것처럼 다시 돌아오지도 그렇다고 닿지도 않아서 애가 탔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가 어떻게 살든, 나 또한 무관심으로 내가 할 일을 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했을 때, 다시 핸드폰을 켜 그가 문자를 읽었나 확인을 해봤지만 사라지지 않는 표식들을 보며 허탈함에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나의 삶이

 

처음으로 

 

 

진심으로 공허하게 느껴졌다. 

 

 

 

 

-

 

 

 

 

한동안 에리카의 바에도 가지 못 했고, 나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진행하느라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서야, 잘 지내고 있냐는 이창경의 연락에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이 끊어져, 쥐고 있던 마우스를 부러트렸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이창경이 민시형에게 직접 사과를 할 수도 없기에 화를 내도 체력 낭비였다. 

 

 

그렇게 창경을 시작으로 내 주변에 존재하는 불필요한 관계들을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빈자리가 익숙해질 때 즈음 해외에서 함께 작업을 하고자 하는 작가에게 연락이 닿아서 출국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출국하면 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기에, 마지막으로 에리카의 바에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들렸던 때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기에 바 안을 한 번 훑고 자리에 앉았다. 

 

" 이권도 내일 또 해외로 출국? "

 

" 아무래도..  같이 작업하고 싶은 작가가 이태리에 있거든. "

 

" 아직도 연락은 없고? "

 

" 누구, 이창경? "

 

입에서 나온 인물이 불쾌했는지 닦고 있던 글라스를 손에서 놓더니 테이블 바를 내려친다. 

 

" 내가 미쳤다고 이창경 안부를 묻겠냐? 네가 좋아하는 사람 말이야. "

 

" 연락도 안 받고,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

 

" 그 미친 재력 뒀다가 어디다 써먹으려고 그래? "

 

" 돈으로는 안 꼬셔질 것 같더라고, 그리고 억지로 찾아내고 싶은 마음도 없어. "

 

좋아하는 사람에게 표현을 해본 적이 언제쯤일까..

 

직접적으로 표현은 못하지만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아서 예전에는 해줄 수 있는 이벤트는 다 해줬던 것 같다. 

 

하지만 오글거린다는 생각만 하고 마음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에 금방 싫증이 나서 헤어졌는데, 이제 생각해보니까 사람에 따라서 전달하고 보답받는 감정이 달라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민시형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진부한 이벤트들도 찾아보고 싶을 것이다. 

감동을 받아서 그 자리에서 곧장 울며, 또 자신의 속을 드러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런 연애들도 재미있을 것이다.

 

아니, 아마도 황홀할지도 모르겠다.

 

 

" 받아. "

 

" 늘 주던 게 아닌데? "

 

칵테일 잔에 담겨 있는 붉은 액체 눈을 사로잡는다.

나에게 주는 게 정말 맞는 것인지 확인을 하기 위해 잔을 잡고 그녀를 쳐다보니 에리카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 라임 말고 단무지를 끼워주고 싶었는데, 오늘 점심이 짜장면이 아니라서 말이지. "

 

" 아쉽군. "

 

" 이권도가 내 농담받아주는 날이 있네? 너 진짜 많이 변했다. "

 

" 변했기보단, 모르고 있던 걸 알게 된 거지. "

 

" 사랑 타령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사랑 타령하고 있네.. " 

 

" 그러는 너도 혼자 있을 때보단, 지금이 더욱 안정적이게 보이니까. "

 

" 덕담까지 해주는 거야? 와.. 사실 출국이 아니라 어디 죽으러 가는 거 아냐? "

 

농담을 던지면서도 나의 반응을 살피는 것을 보니 정말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아직 얻어내지 못했고, 즐기지도 못한 삶인데 쉽게 손에서 놓고 싶지는 않았다.

흥미가 없던 삶에 흥미가 생겼고, 늘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삶에 새로운 자극이 생겼으니까.

 

차분하게 칵테일을 즐기고 싶었지만, 내일 아침 비행기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찍 일어나니 에리카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 가볼게, 입국할 때 찾아올 테니까 "

 

" 아니 도대체 핸드폰 두고 뭐해? 들어오기 전에 연락이라도 하던가. "

 

대충 알았다는 말을 전하고 뒤를 돌아서 바를 나오려는데 바에 있는 사람들 중 민시형으로 보이는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홀리듯이 그 사람을 뒤 따라갔다. 

 

내 눈에 그토록 안 보였던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 어, 무슨 일.. "

 

" 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했네요. "

 

" 혼자 오셨어요? 같이 나갈래요? "

 

민시형이랑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지만 대범하게 사람을 꼬시는 행동은 민시형 답지 않았다.

 

옷을 입는 스타일도 다르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끼를 부리는 모습을 보니 점점 거부감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 자리를 빠져나왔다.

 

집으로 오자마자 비서에게서 나머지 일정을 확인받고 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 가슴팍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을 잊지 못해서 잠시 떠나는 것이지만, 떠나는 순간에도 당신의 그림자를 따라다니는 모습이 스스로 안타까울 지경이다. 

 

" 하아.. "

 

결국, 잠에 들기 전에 비서에게 연락을 남겼다.

 

" 최 비서님,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따로 초대장을 보내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 쌓으려면, 거기에 맞는 노력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일과 연애는 다르지만, 내가 당신에게 맞췄던 속도대로, 우리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던 순간처럼 차근차근 다가가면 언젠간 내게 마음을 다시 열어줄 거라고 생각하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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