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폭상팔 2021. 2. 2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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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b40UzPdN4M


수열이를 집으로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 열병 아닌 열병을 앓았던 것 같다.

정신은 끝없는 타협을 하고 있었기에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몸은 아니었다. 

 

입맛이 떨어져서 밥을 거르는 날도 많았고, 빈속으로 매번 커피만 마셔서 그런지 속이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밥은 먹지 않았다. 

또한, 오랜만에 만났는데 많이 마른 것 같다며 윤지가 밥을 사줬지만 겨우 꾸역꾸역 넣었던 음식들은 결국, 집에서 다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 으윽.. " 

 

" 형, 커피 말고 다른 거 마셔요.. 제가 살게요. "

 

" 형, 레몬차 마실래? "

 

 

성백이와 수열이가 서로 친해지고 나서, 주말에 3명이서 보는 날이 많아졌다.  

속이 쓰려서 눈을 찡그리고 있자, 둘 다 걱정이 되는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표정을 다시 고쳤다.

 

집에 갈 때 위장약이라도 사 가지고 가야겠다..

 

 

" 괜찮아.. 커피 말고 그냥 스무디 종류로 먹을래. "

 

" 계속 형이 사셨으니까 오늘은 제가 결제할게요. "

 

" 그럼 오늘만 성백이한테 얻어먹어야지~ "

 

" 넌 네가 알아서 결제해라. "

 

" 넌 참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화나게 한다? " 

 

 

만날 때마다 서로 투닥거리는 녀석들을 보며 처음에는 곤란했지만, 이제는 익숙하게 그들을 통제하고 웃어넘긴다.

성백이 같은 경우는 과묵해서 수열이랑 잘 어울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같은 나이인데도 형처럼 챙기는 모습을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수열이가 귀찮은 건 절대로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한 선에서 수열이를 받아주고 장난을 쳐주는 건 성백이가 더 나은 것 같아서 오히려 고마워지네..

 

지잉 - ♪

 

" 여보세요? 응? 아냐, 그냥 다음 주 주말에 보자. "

 

 

주문을 마치고 테이블을 잡기 위해서 카페를 둘러보고 있는데 수열이가 전화를 받아 든다. 

종종 그에게 전화가 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예전에는 궁금했지만, 알고 나서는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저번에 집 앞에서 조윤을 마주친 이후로 수열이에게 전화를 하는 사람이 조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열이 또한 그의 전화를 딱히 피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그 사실에 씁쓸할 이유도 없고 서운할 이유도 없어야만 하지만.. 

 

" 형, 저기 앉을까요? "

 

" 그러자. " 

 

전화를 끝마치고 오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자리를 옮기려는 순간, 수열이가 냅다 전화를 끊어버리고 우리를 따라온다.

이야기 다 하고 와도 괜찮은데.. 저러면 상대방이 섭섭할 것 같지만 그래도 그들의 관계에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

 

신경 쓰지 말아야겠다. 

 

" 성백이는 요즘 지내면서 어려운 것은 없어? " 

 

" 네, 형이 말한 것처럼 그냥 믿고 기다리자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어요. "

 

" 그래 너무 재촉하면 오히려 힘들어할 테니까 끝까지 믿고 기다려줘.. 수열이는 별 일 없고? "

 

" .. 응 아무 일도 없었어. "

 

뭔가 대답에서 여백이 느껴졌다는 것은 분명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일 텐데.. 

수열이가 있어서 말을 못 하는 건가..? 아니면 반대로 내가 있어서 말을 못 하는 건가.. 

 

" 정말로? "

 

그의 눈을 마주하고 다시 한번 되물었다.

 

수열이가 뭔가를 잘못했을 때나, 말을 꺼내지 못할 때 그의 눈을 마주하고 바라보고 있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속마음을 털어놨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다정한 눈빛을 한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수열이가 갑자기 한숨을 푹 쉬곤 눈을 피한다. 

 

 

" 아, 음.. 미안해! 말하기 싫을 수도 있을 텐데 너무 집요하게 물어봤네.. 헤헤 " 

 

머쓱한 마음에 소리 나게 웃으며 그에게서 눈길을 돌려 성백이와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수열이가 내 손을 움켜쥔다. 

너무 놀란 마음에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강하게 움켜 잡고 있었던 것인지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 그, 수열아? 아픈데.. "

 

" 피하지 마. "

 

" 엉? "

 

" 지랄하지 말고 형 손 놔라. "

 

무슨 소린가 싶어서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에게 손이 잡혀 있자 성백이가 그 사이를 가로질러 잡힌 내 손을 빼낸다. 

겨우 손이 빠져나오고 얼얼한 손을 살펴보니, 하얀 자국이 남아있던 것이 점차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주 잠깐 그가 주는 아픔에 놀라기도 했고, 마음이 시큰거렸지만.. 손에 남아있는 자국이 수열이가 남긴 자국이라고 생각하니 잠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지, 왜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진짜 미쳤나 봐. 

 

" 아하하, 그.. 그냥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 없길래 좀 걱정되니깐 물어본 거지 별 뜻 없으니까 너무 생각하지 마 수열아. "

 

" 형한테 숨기는 건 하나도 없어.. 다 대답해줄 수 있는데 형이 날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 형도 피한 적 없거든.. "

 

얼굴이 시무룩해져선 귀를 축 내리고 있는 강아지 같아서 그의 코를 살짝 잡아당기곤 앞에 있는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 마셨다. 입 안에서 맴도는 시원한 얼음과 커피 향이 피로를 녹여주는 것 같아서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커피를 마시기도 했고, 오랜만에 디저트가 먹고 싶은데..

집에 가는 길에 얘네들 쿠키 하나씩 사주고 나도 디저트 하나 사들고 갈까.

 

 

작가님은.. 잘 계시려나

 

" 아.. 이런 "

 

" 응? 무슨 일이야? "

 

아까부터 핸드폰을 보고 있던 성백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짐을 급하게 정리한다. 

 

" 오늘 보충해주기로 약속한 학생이 있는데, 시간을 앞으로 당겨야 할 것 같다고 연락이 와서요.. 오늘 아니면 못 한다고 하길래 급하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

 

" 아고.. 고생하네 얼른 가봐. 조심히 가고! "

 

"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형도 조심히 가세요! 야, 간다. " 

 

" 가라. " 

 

성백이가 수열이의 어깨를 두어 번 치더니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황급히 카페를 벗어난다. 

수열이와 둘이서 남는 게 불편한 건 아니지만 요즘은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게 어렵게 느껴진다.

 

정작 수열이는 아무렇지 않을 텐데..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것이지.

 

 

" 아까 형이 집요하게 물어봤던 건.. 요즘 들어서 너랑 이야기도 자주 못 했고, 작은 고민도 함께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물어본 거였어. "

 

" 고민이 있긴 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어.  " 

 

" 미안.. 성백이도 있었고 내가 성급했지? "

 

" 김성백은 이미 알아. 전에 만나서 이야기했거든.. "

 

" 아..? "

 

 

수열이의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더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와 지내오면서 나보다 우선시가 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고민이 많아 보였던 수열이가..

나를 찾는 게 아닌, 다른 사람을 먼저 찾았다는 사실에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 왜? '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최근까지 나의 행동을 보면 내가 그에게 우선시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더 많았다. 

 

내가 뭐라고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며, 내가 무슨 주제로 그의 곁을 지키려고 하는 걸까.

 

그래.. 뻔뻔하기도 하지.. 

 

 

 

" 그랬.. 구나. 서로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

 

" 우연히 성백이가 내 고민을 알아차려서 어쩔 수 없이 말하게 된 거야. "

 

" 그래도.. 곁에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니까. "

 

" 형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주고, 같이 아파해주니까.. 내게서 형도 정말로 고마운 존재야. " 

 

대화를 하고 있는 중에 나는 눈 앞에 있는 잔을 보고 있지만, 수열이는 떨리는 내 눈을 보고 있었는지, 대답을 하면서 손을 꼭 붙잡아 준다.  

 

" 너에게서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게 정말 다행인 것 같아.. "

 

" 그 사람들보다 형이 더 좋고, 더 소중해. "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에게 있어서 나란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눈빛이 너무 다정하고, 너무 절박해서.. 오직 나밖에 없다는 듯 말해주고 있어서 더욱 마음이 아려온다.

 

내가 널 바라보는 눈빛과 네가 날 바라보는 눈빛이 언제나 같을 줄 알았는데..

이젠 널 소중하게 여기는 것조차 죄가 될까 봐 무서워 수열아.

 

" 나도 이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해. "

 

내 입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담아보지만, 이 의미가 어떠한 뜻을 품고 있는지 수열이는 알지 못할 것이다.

널 아끼며 널 가장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내 사랑을 포장하고, 이젠 형으로서 또는 가족으로서 널 지켜준다는 말로 나에게서 벽을 세울 것이다. 

 

" 수열이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내가 함께 있으면 좋겠어. "

 

" 형이 내 행복이야. "

 

" 오구.. 이렇게 예쁜 말을 어디서 배워 온 거야.. "

 

" 형을 보고 있으면 생각하지 않아도 말이 바로 나와, 형에게 말해주고 싶어. "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의미로 그의 머리칼을 어뤄 만져주자, 내 움직임에 맞춰서 수열이 또한 얼굴을 비비적댄다.

 

너에게서 사랑을 받는 사람을 얼마나 행복할까? 

 

다정한 말로 이름을 불러주고 사랑한다고 속삭여주겠지?

 

늘 바라보겠다고, 늘 사랑하겠다고 입을 맞춰주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사랑을 느끼겠지? 

 

그리고 헤어짐에 아파하는 순간에도 사랑했던 추억들을 되새기며 또 다른 사랑을 하겠지.. 

 

 

아마 난, 그 순간마다 너의 곁을 지킬 수 없어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고, 이를 악 물고 너를 위로할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수열아.. 

 

" 내가 널 좋아하고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받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

 

" 나는 형만 있으면 되는데... "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비비는 그를 밀어내지 않고 두 손으로 양 볼을 잡아 부드럽게 문질러줬다.

다 큰 성인이지만 미미하게 잡히는 볼이 너무 귀엽네.. 

 

" 형이 행복한 게, 수열이의 행복이라고 했지? "

 

" 응.. "

 

" 그럼 우리 서로가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해야겠다.. 나도 수열이가 행복한게 내 행복이야. "

 

" 나는.. 형이 내게서 멀어지지만 않으면 돼. "

 

" 오구오구.. 내가 널 두고 어딜 가.. "

 

너의 곁에 마주 서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늘 너의 뒤에서 널 지킬게. 

 

 

수열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 손에 얼굴을 묻고 쓰다듬는 손길만을 느끼고 있다.

카페 안에서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이 느껴지고, 창문에서 내려오는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오랜만에 단 둘이서 여유를 느끼는 것 같다.

 

" 형.. "

 

" 응? "

 

" 형이랑 이렇게 있는 거 기분 좋아.. "

 

" 나도 강아지 만지는 것 같아서 좋아. "

 

" 강아지 아니라 사람인데... "

 

" 오냐 최수열~ 네가 강아지보다 더 귀여워~ "

 

" 형도 귀여워.. "

 

수열이가 고개를 들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손을 잡더니, 그 손을 자신의 볼에 대곤 나를 마주 본다.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너무 다정하고, 대놓고 너무 잘생겨서 자동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다.

 

" 얼굴 빨개지는 것도, 지금 내 눈 피하는 것도 귀여워. "

 

" 언제는.. 피하는 거 싫다면서 "

 

" 이렇게 좋다는 티 내면서 피하면 너무 좋아.. "

 

" 형한테 그런 소리 하는거 아냐. "

 

" 그럼 누구한테 해야 해? "

 

누구한테 하기는.. 당연히 너랑 만나고 있는 사람한테 해야지..

이번에는 뭔가 여유롭고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으니 얄밉게 느껴진다. 

 

" 음.. 네가 사귀고 싶은 사람? "

 

" 형..? "

 

" 응? "

 

" 형. "

 

" 왜? "

 

내 눈을 바라보며 자꾸 나를 부르길래 무슨 속셈인가 싶어서 계속 대답을 해주니, 이젠 눈을 감아 배시시 웃어 보인다. 

나는 또다시 장난치는 그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포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던 분위기도 잠시, 수열이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

 

" 응..? "

 

그의 머리칼을 만지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고 움직임은 점차 느려졌다.

내 손이 갑자기 멈춘 것을 느꼈는지 수열이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그에게 어색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아무렇지 않게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잘생기고 멋있는 널, 누가 사랑하지 않아? 

 

" 좋아한다고 수없이 말하고 있는데.. 닿지 않아서 속상해. "

 

" 사실 그 사람도 널 좋아하는데 말하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닐까..? "

 

" 그냥 부끄러워하지 말고 다가와줬으면 좋겠어.. "

 

서서히 내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더니 손깍지를 끼곤 힘을 준다. 

그에게 붙잡힌 손이 불쾌하진 않지만, 그가 점점 다가올수록 마음 한 칸이 시려온다. 

 

그래도, 수열이가 나에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말을 해줬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 나에게도 다정한 수열이지만, 너는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한 없이 다정하고 좋은 사람일 것 같아. "

 

" 형은 그렇게 느꼈어? "

 

" 응응,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본 적 없지만 그래도 내가 봐 왔던 너는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니까.. "

 

" 형이 본모습이 아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의 모습이 아닐까..? "

 

".. 난 형이고 네가 만날 사람은 정말 널 사랑하는 사람인 거잖아.. " 

 

" 난 형이 좋은데...? "

 

또, 또 저렇게 설레게 나를 쳐다본다. 

 

지금 나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비교를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건지 이젠 점점 헷갈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저런 눈으로 날 바라보면서 말하고 있으니까 더욱 오해하기 쉬워지잖아..

 

" 아무튼,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네가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 널 좋아하고 있을 테니까. "

 

" 진짜? "

 

그래, 내가 그 사람이면 너 정도면 진짜로 사귀지.. 사귀다 못해 맨날 어화둥둥 내 새기 하고 안고 다닐 것이다.

 

뭐.. 지금도 딱히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 내가 그 사람이면 너랑 사귄다. "

 

" 형?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수열이를 마주하는 순간, 내 몸에 존재하는 모든 땀구멍이 다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만, 미친..

내가 지금 입 밖으로 말한 거야? 

 

 

" 그게, 내가, 아마도,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너랑 사귈 거란 말이지.. "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너무 당황스러워서 재빠르게 수습을 해보려고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정리가 되지 않았고 온통 버벅거리기 바빴다. 

 

" 형 지금 나 좋아하잖아. "

 

" 그건, 가족으로서 좋아한.. 다고 " 

 

" 나도 형이라면 사귈 것 같아. "

 

뭐라고..?

 

 

버벅거리던 말들도, 당황해서 정리가 안되던 머리도, 어떻게든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흐르던 등도.. 

수열이의 말에 모두 순간적으로 정지되어버렸다. 

 

그리고 곧 이어서 다리부터 머리 끝까지 천천히 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대로라면 얼굴이 붉게 물들 테고, 수열이는 내 반응을 보고 나에 대해 오해할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도 심장이 뛰지 않는다면.. 아니지, 뛰는 게 더 이상하잖아.

 

" 너랑 사귀면 재미있긴 하겠다. 그래도 매일 보니깐 지금이랑 다를 거 없을 것 같네~ "

 

" 사귈까? "

 

" 그렇게 가서 고백하면 안 넘어올 사람 없다고 생각한다. " 

 

이번에는 그가 사뭇 진지해 보여서 좀 흔들릴 뻔했지만, 태연하게 웃어넘기며 앉은자리를 정리했다.

다 마신 컵을 정리하고 카페를 벗어 나가 집으로 가는 중에도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수열이가 갑자기 힘을 주고 날 멈춰 세운다.

 

" 형. "

 

" 응? "

 

" 좋.. " 

 

" 수열이 형? "

 

멈춰 선 수열이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사이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조윤이다! "

 

" 하.. 씨발.. "

 

순간, 내 귓가에 작은 욕설이 들려왔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수열이 입에서 욕이 나왔다는 건데..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하니 정말로 화가 난 듯했다.

 

조윤이랑 무슨 일이 있었나..?  

 

" 형 집 앞까지 찾아갔었는데.. 형이 안 계셔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쳤네요! "

 

" 그랬구나.. 둘이 볼 일 있으면 내가 자리 피해 줄게 "

 

" 형 가지 마. "

 

 

자리를 피해 주려고 몸을 틀어 다른 곳으로 향하려고 했지만, 수열이가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둘이 싸운 건가..? 그래서 단 둘이 같이 있는 게 어색해서 그런 건가..

 

" 형 주변에 있을 테니까.. 이야기하고 와 수열아. " 

 

" 혀엉.. "

 

" 다녀와서 형 집에 가서 저녁 먹고 가자. 그럼 됐지? "

 

" 응.. " 

 

다 컸지만 종종 귀엽게 굴어서 저절로 머리에 손이 간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고개를 끄덕이고 조윤을 바라본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조윤이 나와 수열이 사이로 성큼 다가오더니 심호흡을 하곤 곧바로 수열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 형, 저 형 좋아해요. "

 

" 뭐? "

 

" 아. 그, 저.. 자리 피해줄.. "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다리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조윤이 수열이를 좋아할 거라곤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열이도 조윤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 둘이 있는 모습을 보면 심장이 뛰다가도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피해 도망가고 싶었지만,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조윤이 하는 말을 또박또박 들을 수밖에 없었다. 

 

" 2년 동안 계속 짝사랑했어요. 형 군대 가는 것도 기다렸고, 형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시간표도 최대한 겹치게 했어요. 사실 제 전화 귀찮아하시는 것 같아서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는데.. 늘 다른 분과 계시는 것 같아서 불안했고.. 그리고.. "

 

아마 다른 분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나일 테지..

나를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을 하고 있으니, 내가 대놓고 방해꾼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서로 좋아할 텐데.. 내 예상과 다를 거 없이 나라는 존재가 수열이에게 마음을 품고 계속 맴돌아서, 주변 사람 또한 수열이에게 다가올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정말로 자리를 피해 줘야 서로 진실된 이야기를 할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고, 그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걸어갔다. 

 

고개를 돌리면 수열이가 날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있는 조윤을 바라보며, 수열이 또한 마음을 고백하고 있을까..? 

 

어느 상황이든 마음이 편하진 않구나.

 

' 지잉 - '

 

 

" 응..? "

 

연락 올 사람이 없는데.. 

아 성백이가 이동하면서 연락한 걸까? 

 

' 시형 씨, 잘 지냈어요? ' 

 

" 작가님? "

 

[이권도 작가님]이라고 적혀있는 화면만 봤을 뿐인데, 왜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모르겠다.

 

의지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늘 기를 쓰며 지내왔던 것 같은데 작가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작가님에게 의지를 하는 것 같다.

 

많은 것을 공유하거나 이야기를 하진 않지만, 이권도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난 이후는 항상 마음이 가벼웠고..

뭔가 새로운 것들이 마음을 또 채우는 것 같아서..

작가님이 첫인상은 좀 싸늘했지만, 지금은 한 없이 다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 네, 작가님은 건강하신가요? 눈도 왔고 날씨도 많이 춥더라고요.. '

 

' 저는 괜찮아요. 이번에 시형 씨랑 밥 같이 먹고 싶은데, 시간 있어요? '

 

' 평일에는 늦을 것 같고.. 주말은 괜찮아요. '

 

' 난 시형 씨랑 늦게까지 있고 싶은데. '

 

' 다음에 시간 나면 같이 있어요! 저는 작가님이랑 있으면 늘 편하고 좋았어요. ' 

 

 

답장을 보냈지만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 길어서 혹시나 말실수라도 했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에 깜짝 놀라 전화를 받았다.

 

" 시형 씨 잘 지냈어요? "

 

" 아.. 네 그.. "

 

" 통화 하기 곤란해요? "

 

" 그런 건.. 아니고 깜짝 놀라서요. " 

 

" 오랜만에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그래서, 언제 시간 가능해요? "

 

" 작가님도 평일에는 바쁘실 것 같은데.. 아 주말에는 또 쉬셔야 하고.. 음 "

 

" 시형 씨를 만나는 게 일이라고는 생각 안 해요. 휴식이죠. "

 

이권도는 정말 첫인상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짧은 시간에 통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쓸쓸하고 아려왔던 심장이 다시 따뜻해지고, 불안한 생각보다는 얼른 이 사람을 만나서 더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작가님처럼 좋은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행복할까.. 

 

" 그럼.. 내일모레 괜찮으세요? "

 

" 일 끝나고 데리러 갈까요? "

 

" 제가 작가님 작업실로 갈게요! "

 

" 내 작업실이 어딘 줄 알고.. 그냥 내가 데리러 갈게요. 날씨 춥기도 하고 감기 걸리면 고생하니까. "

 

" 감사합니다.. 아, 혹시라도 일 생기신다면 바로 연락 주세요! "

 

저번처럼 일이라도 생겨서 약속 시간을 거절당하는 일은 좀 슬프겠지만..

그래도 바쁜 사람이 날 만나준다는 자체가 고마운 일이니까. 

 

그래도.. 2번은 거절 안 당했으면 좋겠다. 

 

" 음.. 저번에는 미안했어요. 이번에는 꼭 근사하게 대접할게요. "

 

" 아녜요! 작가님이 바쁘신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니까.. " 

 

" 그럼 내게서 약속을 거절당하는 것도 당연한 건가요? "

 

" 아.. 그건.. 아니지만... "

 

다정한 목소리로 갑자기 매몰차게 말을 해버리니까 가슴이 시큰거린다.

 

" 잘 알고 있네요.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 난데 시형 씨가 그렇게 대하면 어떡해요. "

 

" 아.. 죄송합.. "

 

" 사과하면 만났을 때 집 안 보낼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

 

" 아.. 그.. 감사합니다..? " 

 

" 잘했어요. 학원 끝나고 그때 기다리던 곳에서 있을 테니까 이번엔 천천히 와요. "

 

날 혼내던 목소리는 어디 가고, 나를 차분하게 다독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와 통화를 하는 순간이 너무 행복했고 위로가 됐다. 

 

고맙다고 말하면.. 좀 이상하려나? 

 

" 네.. 그 작가님! "

 

" 네? "

 

" 감사합니다.. "

 

" 이번에 만나면 더 고마워해야 할 걸요? " 

 

이권도는 누가 들어도 기분 좋은 웃음을 남기며 전화를 끊었다.

아직도 귓가가 간지럽고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아서 입꼬리를 꾹꾹 누르고 뒤를 돌아 상황을 살펴보려고 했는데 조윤은 어느새 사라지고 수열이만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윤이는? "

 

" 형. "

 

" 어? "

 

" 누구야? "

 

" 응? "

 

조윤과 이야기를 잘 못 끝냈는지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이고, 어쩐지 화가 나보인다. 

 

누구냐고 물어보는 건.. 아마 내가 통화를 한 사람을 물어보는 걸까? 

그럼 언제부터 이야기를 끝내고 듣고 있던 거지? 

 

" 작가ㄴ.. 읏 "

 

" 형... "

 

" 수열아, 아파..! "

 

손목을 심하게 움켜 잡은 수열이가 갑자기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로 그를 다독이고 싶었지만 손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는 것 빼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수, 수열아 아파. "

 

" 혀엉.. 나도 아파.. "

 

" 어? 어디가..! 어디가 아파!? "

 

언제 어디서 내가 한눈 판 사이에 다치기라도 한 걸까? 

걱정이 되어서 어떻게든 잡고 있는 손을 치우고 수열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

" 형이 자꾸만 멀어지는 것 같아서 아파.. "

 

" 무슨 소리야.. 형이 언제 멀어졌어. "

 

" 내가 조윤이랑 사귀었으면 좋겠어? "

 

사귀라고 말해줘야 한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너도 사랑받고 너 또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아파했으니까 서로가 만난다면 서로의 상처를 안아줄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나보다 더 나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해줘야 하는데..

 

그가 나한테 왜 조윤과의 관계를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 내가.. 만나지 말라면 안 만날 거야? "

 

" 당연한걸.. "

 

" 왜, 왜 당연한 거야? "

 

" 내가 형을 좋아하니까. "

 

수열이가 지금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

 

만약 또 나의 착각이라면..

그리고 같은 마음이라고 해도 수열이를 만나면서 서로가 지치면 어쩌지, 아예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면.. 어떡하지.

 

수열이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날이 온다면..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 형. "

 

" 미, 미안. "

 

" 왜.. 왜 우는데 형.. "

 

" 수열아 그, 나중에 만나자. "

 

" 지금 가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는 건데? "

 

" 수열아 제발.. 나, 너랑 멀어지고 싶지 않아. "

 

방금 전 통화하면서 위로받았던 마음들이 무너지다 못해 사라지는 것 같다. 

한 줌의 모레 알도 남지 않고 모든 게 부서지고 사라지고 난 뒤에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오는 것 같아서 더 숨이 막혀온다. 

 

널 사랑하고 있는 내가 무섭고, 앞으로 변할까 봐 .. 평생 너를 보지 못 할까봐 이 상황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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