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폭상팔 2021. 1. 29.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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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wvzd3tkTRk


[ 7 : 06 ] 

 

자고 일어나 눈을 떴을 때 바로 앞에 보이는 전자시계가 05에서 06으로 바뀐다.

 

잠을 오래 자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없이 일어날 수 있었고, 탁자 위에 둔 태블릿과 안경을 손에 쥔 채 침실 밖으로 나가 커피를 내렸다.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위치도 가구도 아닌, 새벽에 갓 내린 커피 향기가 집 안을 가득 채울 때가 마음에 든다. 

카페를 찾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찾는 것이고, 작업실에도 항상 커피 머신을 구비해놓을 정도로 중독되어 있으니까.

다만, 디저트 같은 경우는 단 걸 먹으면 확실히 작업량도 늘어나고 결과물이 만족스러워서 사 먹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린 커피를 손에 쥐고 오늘 할 일에 대해서 살펴보는 와중에 이른 아침부터 연락하는 창경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 금요일 밤 11시 OO 호텔 740호. '

 

 

그가 이런 문자를 보낸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오늘따라 불쾌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그의 연락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읽었다는 답장 하나 없이 화면을 끄고 커피를 한 모금 넘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시계가 7시 43분을 가리킬 때 즈음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고, 샤워를 끝마치고 나갈 준비를 한다. 

 

작업실에 딱히 얼굴 도장을 찍을 사람도 없고, 혼자 작업하는 시간이 많아서 느긋하게 가도 상관없지만, 9시 정각에 꼭 작업실에 도착해서 사진을 천천히 나열해서 한참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입고 있던 코트와 목도리를 벗어놓고, 어느 때와 다름없이 10장의 사진을 눈 앞에 나열했다.

 

이번에 여행을 다녀오면서 찍었던 사진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 복잡하고 사진을 찍을만한 구도도 아니었으며, 유난히 들러붙는 사람이 많았던 곳이라 사진에 집중하기 힘들었던 게 떠올라 아침에 정리했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넓게 트인 작업실과 그 가운데에 10장의 사진, 그리고 의자 하나만을 두고, 시간이 지나가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사진만을 바라만 보고 있던 그는 책상 위에 위치한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자 사진만을 보고 있던 시선을 그곳으로 돌렸다. 

 

한참을 보통이면 1시간 안에 끝나던 선별작업이 오늘은 꽤 오래 걸렸기도 했고, 곧바로 외부업체와 잡은 약속 때문에 카페와 작업실 그리고 협력 업체 등을 방문하니, 동선을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많이 지나갔다.

 

오늘 약속한 일들을 다 끝내고 작업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7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창문 밖에는 어두컴컴해서 가로등 불빛만이 거리를 듬성듬성 채우고 있다.

퇴근을 하는 시간이기도 해서 도로를 채운 차를 바라보고 있던 와중에 문득, 어제 민시형에게 보내지 못 한 문자가 생각나기도 했고 그가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궁금했다. 

 

더 정확하게는 밤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궁금했었고, 그렇기에 충동적으로 문자를 보냈다.

 

 

' 주말은 잘 보냈나요? '

 

' 네! 작가님도 주말 잘 보내셨나요? '

 

' 저는 시형 씨 없어서 좀 외롭게 보냈는데. 잘 보냈다니 다행이네요. '

 

 

미련 있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는 말이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민시형이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을 할지 궁금해서, 그저 나의 재미를 위해 보낸 문자니까. 

하지만, 에리카와 창경이 이 문자를 본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비웃었겠지. 

 

' 천하의 이권도가 외롭다는 소리를 하고 앉아있네. '

 

' 살다 살다 내가 이권도의 이런 모습을 보다니, 전 남자 친구도 아니고 엄청 구질구질하다. ' 

 

그러나, 그들에게 보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보낸다고 해서 민시형은 날 구질구질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도 알기에 뻔뻔하게 그에게 말을 흘렸던 것도 있다. 

 

남들은 사람 하나 따먹어 보려고 가식을 떤다고 하지만, 어떠한 방식이든 동의 없는 관계는 강간이니까.

그가 동의를 할 수 있게 여지를 만드는 것뿐이지 죄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민시형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휘둘리겠지.

 

 

'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같이 보내요! 작가님이 초대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ㅎㅎ '

 

' 좋아요. 먹고 싶은 건 있어요? '

 

' 저는.. 음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ㅁㅓㄱ어요 '

 

 

문자를 기다리는 중에 그에게서 엉성한 문자가 돌아왔다. 

그가 다른 일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 동생이라는 놈과 같이 붙어 있어서 문자를 보내기 곤란한 상황인가?

 

 

' 그럼 양식은 괜찮아요? 예전에 파스타를 좀 배웠는데 해주고 싶어서요. '

 

' 좋아ㅏ요! '

 

 

또다시 엉성한 문자가 오니까, 슬슬 기분이 나빠진다.

처음에는 귀엽게 봐줄 수 있었지만, 나에게서 집중을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진 몰라도 나의 연락보다 우선시하는 것 같아 불쾌해진다.

 

계속 이런 식으로 멀어지려고 한다면 곤란하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서 몰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민시형은 분명 도망 갈터이니, 다 잡아놓은 사냥감을 놓치기엔 아까우니까 굽히고 들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되어 다시 참고 연락을 했다. 

 

 

' 또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준비할게요. '

 

' 시형 씨? '

 

' 바빠요? '

 

 

문자를 보냈지만, 읽었다는 표시 조차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다른 사람과 있거나, 아니면 답장을 주고받기에 곤란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전화를 걸었다.

 

보통의 나라면 귀찮아서라도 전화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놈에게서 나와 거리를 두라는 말이라도 들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가고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안내원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에게서 걸었던 전화를 종료하고 바로 창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통화가 연결되고, 주변이 시끄러운 것을 보니 이른 시간부터 에리카네 바에 간 게 분명하겠지.

 

 

" 권도? "

 

" 에리카랑 있어? "

 

" 나야 뭐, 저녁마다 에리카 바에 있지? 왜? "

 

" 호텔 앞으로 와. "

 

 

창경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은 후 작업실에 널브러진 사진들을 내버려 둔 채 겉옷과 목도리만 챙겨서 나왔다.

주차장에 세워둔 검은색 세단에 몸을 실어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간 차는 15분 정도를 달리더니 익숙하다는 듯 호텔 앞에 멈춰 섰고, 이권도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대기하고 있는 발레파킹 요원에게 맡기고 호텔에 들어간다. 

 

지잉 -

 

' XX 호텔 1103호 ' 

 

에리카 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텔이라 그런지 이미 도착해 있는 창경에게서 호텔 방 호수를 전달받고 그곳으로 향했다. 라운지 밑에서 받았던 카드 키를 꺼내어 문에 대고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씻고 나오는 창경과 눈이 마주쳤다. 인사를 할 틈도 없이 그가 입고 있던 가운을 끌어당겨 침대 위로 눕히고 입고 있던 옷을 거칠게 벗으니 창경이 비웃기라도 하듯 쿡쿡대며 내게로 손을 뻗는다. 

 

 

탁 -

 

" 손대지 마. "

 

" 이권도.. 왜 이래? "

 

 

창경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무시한 채로 옷을 벗고 난 후 그에 바로 거친 추삽질을 했다.

사람을 억지로 안는 취미는 없지만,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따라 스트레스가 극에 다른 것 같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아서, 고통스럽게 소리를 내뱉는 창경을 배려하지 않고 거칠게 움직이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인지 억지로 내빼려는 그의 발을 고정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채로 움직였다.

 

" 이, 이권도 제발.. "

 

결국, 창경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모습에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징징거리는 놈들은 딱 질색이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이성을 잃고 덤벼든 게 맞았으니까.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멈추고 창경의 몸을 닦아주고, 그가 편히 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뒤  호텔 방에서 나오려고 하자 창경의 목소리가 들린다. 

 

 

" 너 요즘 진짜 왜 그러는데. "

 

" 내가 뭘? "

 

" 에리카한테 들었어, 만나는 사람 있는 것 같다고. "

 

"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

 

" 네가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 아냐? "

 

" 에리카가 헛소리를 했을 뿐이고, 애인을 만나든 안 만나든 너와는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었어. "

 

 

평소에 누구랑 관계를 맺든 신경도 쓰지 않았던 창경이 오늘따라 질척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시간을 뺏어서 폭력적인 잠자리를 가지게 한 건 내 잘못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빌미로 나의 생활에 침범하려고 하는 것은 딱 질색인데. 

 

" 너야말로 요즘 나한테 선을 넘는다고 생각이 드는데. "

 

" ... 내가 선을 넘, "

 

지잉 , 지잉 -

 

창경이 입을 열어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 코트 안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고 혹시나 해서 확인을 해보니 연락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민시형이었다. 

고민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자 창경이 고개를 돌리고 호텔 밖 창문을 바라본다.

 

" 여보세요. "

 

" 작가, 켈록 니임.. 죄송해요. "

 

핸드폰 건너편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방금까지 불쾌했던 기분이 사리지는 것 같았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했던 목소리와는 많이 달리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지만, 힘이 없는 목소리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몸을 곧장 돌려서 호텔 방을 나가려고 했지만, 언제부터 날 쳐다보고 있었는지 멍하게 앉아서 내가 위치한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던 창경이 보였다. 

 

" 어디 아파요? "

 

"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요. 약 기운 때문에 잠들어서 중간에 연락이 끊겼어요. 죄, 켈록, 송해요. "  

 

" 괜찮아요. 큰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걱정했어요. "

 

" 걱정시켜드려서 죄송해요... "

 

" 우선 푹 쉬고 나중에.. 아니, 곧 만나요 시형 씨. 잘 자요. "

 

" 감사합니다.. "

 

통화가 종료되고 몸을 돌려서 나가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달려오는 창경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대로 품 안에 그를 안는 꼴이 되어버려서 그를 밀치려는 순간,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창경과 눈이 마주쳤다.

 

" 뭐하는 짓이지? "

 

" 이권도, 진짜 연애하나 보다? "

 

" 너나 에리카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좀 그만 할 수 없어? "

 

" 넌 오늘 나 이렇게 만든 거 진짜 돈으로도 못 갚아. 알아? "

 

" 네 몸 값이 그렇게 비싼 줄 몰랐는데, 아무 놈한테나 대주는 거 보면. "

 

" 너한테만 대준다면? "

 

" 글쎄, 내 쪽도 그렇게 깨끗한 편은 아니라서. "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그가 떨어지더니, 뭐가 좋은 건지 실실 웃으며 널브러진 가운을 주워 입는다. 

그리고 방 안에 준비되어 있는 와인을 천천히 와인 잔에 따르더니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며 작은 실소를 터트린다. 

 

" 이권도 네가 유명하기도 하고 아무나 못 만나는 사람이란 것도 알아. 너나 나나 평범한 연애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란 건 네가 제일 잘 알고, 어느 누구에게도 떳떳하지 못할 거란 것도 알잖아? "

 

' 그러니까 너는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할 테니까 ' 꿈도 꾸지 말라는 말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게 보인다. 

 

연애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진정으로 사랑을 할 생각도 없지만, 남이 먼저 시비를 거는 것에 무시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 차라리 대놓고 끼리끼리 붙어먹는다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군 "

 

하지만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하든 이득이 생기는 것은 없기 때문에, 기분 나쁜 호텔 방을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되어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고 했다. 호텔 방 문 앞에 도착해서 문고리를 내리려는 순간 떠올랐다. 

 

아, 가기 전에.

 

" 너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런 쓰레기에게 헛된 마음을 품고 있을까 봐 걱정돼서 하는 소리인데. "

 

" 뭐? "

 

" 끼리끼리 연애할 생각 없으니까 꿈 깨라고. "

 

그 말을 끝으로 호텔 방을 나와 맡겼던 차를 되찾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창경과 호텔 방에 있었던 일을 뒤로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그 사이에 창경과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원래도 주고받을 만큼 좋은 사이도 아니었고, 단순히 에리카 바에 가서 마주치면 이야기를 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에리카가 또 무슨 말을 퍼트리고 다니나 싶어서 오늘은 작업이 끝나고 에리카 바로 향했고, 오자마자 눈을 피하는 에리카를 보며 알 수 있었다. 

 

" 에리카. "

 

" 아니~ 창경이가 하고 물어보길래 대답해준 거야. "

 

" 내가 일반인과 연애를 한다고? "

 

" 그냥 썸이라고만 했는데?! 아니, 그건 그렇고. 권도! 창경이랑 싸웠어? "

 

내가, 누구랑 싸워?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싸울 만큼 친했던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싸웠다고 봐야 할까?

 

" 내가 왜 걔랑 싸우는데. "

 

" 어제 창경이 와서 술만 먹다가 가는 줄 알았는데 대뜸 울어서 놀랬잖아. "

 

" 나랑 하는 게 싫었나 보지. "

 

" 이권도 밤 자리 스킬이 많이 후퇴했다고? "

 

" 에리카. "

 

" 장난 장난~ "

 

바로 앞에 놓인 잔을 들고 한참을 젓고 있으니 에리카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만 본다.

창경이 무슨 일이 있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만, 내게서 마음이라도 있는 것 같은 행동을 하면 더 골치 아픈데 저번에 했던 말을 듣고 알아서 잘 정리할 거란 생각은 더더욱 안 했지만 에리카 앞에서 울기까지 했다니.

 

 

" 그래서, 요즘은 연락 잘해? "

 

" 너나 이창경이나 나한테 왜 이리 관심이 많아졌지? "

 

" 난 원래 권도한테 관심 많았는 걸~? "

 

"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슈에 관심이 많았겠지. "

 

" 그것도 맞지. "

 

 

호텔 이후에 시형과 연락을 주고받긴 했다. 

길게는 하지 못 하더라도 그가 무슨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최근에는 불어나는 학생들 때문에 많이 힘들다며 기운 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으니.

 

몸도 잘 챙기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고, 끼니를 제 때 챙겨 먹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감기에 대해서 물으면 괜찮다는 말만 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병원을 가지 않고 종합 감기약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도시락 업체에 연락을 해서 보내줄 수도 있고, 병원에 억지로 데려가서 진료를 보게 할 수도 있지만 혹여나 과한 배려로 인해 부담스러워서 피하는 것은 보기 싫었으니까.

 

 

" 이권도. 너 요즘 바 오면 되게 조용한 거 알아? "

 

" 그게 왜? "

 

" 너 바에만 오면 무조건 사람 하나 얻어서 나가고 그랬는데, 요즘 들어서 둘러보지도 않고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잖아? "

 

" 피곤해서. "

 

" 연애 사업이 잘 안돼? "

 

" 에리카.. "

 

" 도와줄게. 나 요즘 한국 드라마 열심히 보거든! "

 

 

그녀가 보는 한국 드라마가 뭔지는 몰라도 대부분 진부한 로맨스를 꼬아서 만드는 드라마겠지.

드라마에서 나오는 주인공들도 민시형 같은 타입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쪼록 그녀가 해주는 조언은 쓸모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잔을 기울이는데, 문득 민시형에게 이렇게까지 잘하려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 선물을 하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보고 싶으면.. "

 

" 사랑이지. "

 

" 단순히 섹스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

 

" 그럼 그냥 눕혀. "

 

" 그러면 도망갈 텐데. "

 

" 네가 그 사람보단 힘이 세겠지, 그냥 눌러! "

 

" 날 싫어하게 될 텐데. "

 

" ... 뭐? "

 

 

에리카 말대로 돈을 쓰든 힘을 쓰든 민시형을 억지로 눌러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가 하기 싫어하거나 나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고 사랑하고 있는 그에게 미움을 받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면 정말로 악한 사람이 돼버릴 것 같았다.

법을 거스르는 일 빼고는 여러 가지를 해본 것 같아서, 좋은 사람이 아닌 것도 알고 욕도 많이 먹어봤지만 민시형만큼은 나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항상 호감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든다.

 

" 취했어..? "

 

" 그런가 보지. "

 

" 이권도, 저기 앉아 있는 금발 있잖아. 되게 잘 나가는 모델이거든? 저 사람 어때? "

 

그녀가 갑자기 창가에 앉아있는 금발머리 남자를 가리킨다.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언제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권도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살짝 손을 흔들더니 배시시 웃어 보인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마치 처음 민시형을 마주했던 때가 생각나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합석을 요청했고 그와 술잔을 기울이며 밤을 보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당연하게도 호텔 방에 있었고, 옆에서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금발머리 남자를 한참 쳐다봤다.

이상형도 아니고, 눈에 띄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배시시 웃던 그 모습이 생각나서 관계를 맺고 있을 때도 얼굴을 보려고 집요적으로 굴었던 게 기억이 난다.

 

하지만, 부끄러웠던 모습과는 다르게 쾌감에 젖어 입을 벌리고 앙앙대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지 만족스럽진 않았다.

작업실로 가기 위해서 샤워를 하고 클리닝을 맡겨놨던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와중에 목소리가 들렸다.

 

" 가요..? "

 

" 일이 있어서요. "

 

" 다음에도.. 만났으면 좋겠는데. "

 

" 기회가 된다면 말이죠. "

 

거절의 의미로 했던 말이고, 그 의미를 알아 들었는지 풀이 죽어있는 채로 침대 시트에 고개를 박고 있는 모습이 마치 그와 겹쳐 보여서 충동적으로 금발머리 남자의 번호를 받았던 것 같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번호를 받고, 다음 잠자리를 기약하는 모습까지 보여줘 버렸으니.

요즘은 자꾸만 흐트러지는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서 피곤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널브러진 사진들을 다시 정리하고 어느 정도 선별된 사진들을 뽑아놓는 중에 한 장의 사진이 눈에 걸렸다. 

마음에 들었던 사진도 아니고, 2년 전 전시회에 걸어놓고 싶지 않았는데 하나만 더 전시하자는 말에 걸게 된 사진.

 

바로 그 사진을 파기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전시를 했던 사진이기에 작업실 구석에 뒀는데 오늘은 그 사진에 눈이 간다.

걸어놨던 사진을 전시회에 걸어놓진 않지만 그래도 저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대상을 고민도 하지 않고 민시형으로 결정되었다. 

 

사진을 받게 된다면 무슨 표정을 짓을까. 

 

똑똑 -

 

 

" 택배 왔습니다. "

 

" 감사합니다. "

 

사진을 어떻게 보여줄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시형에게 줄 꽃차 세트가 작업실로 도착했다.

 

예전에 전시회를 열었을 때 전시회장 측에서 팬이라고 선물로 받은 꽃차가 있었는데, 부모님이 집에 오셔서 대접을 할 때나 다른 사람들에게 커피 대신 차를 대접할 때 좋은 평을 들어서 주문을 했다.

 

그에게 줄 선물도 챙겼으니, 지금 출발한다면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선물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오늘 할 작업을 뒤로 미루고 그가 일하는 학원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학원에 도착했을 때 시간이 꽤 지나있었고, 늘 9시 넘어서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이쯤 되면 시형이 퇴근을 했을 거라 생각이 들어 그의 학원 앞에 차를 세워두고 그에게 연락을 넣었다. 

 

 

' 혹시, 시형 씨 언제 끝나요? '

 

 

연락을 하고 있는 도중에 대답이 끊겨서 이번에도 결국 기다리지 못하고 전화를 하니, 바로 시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기 괜찮아졌다면서 무슨.. 아직도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오는데. 

 

밑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뒤로 전화를 끊고 차 밖으로 나와 그를 기다리는데 계단에서 급히 내려오는 그가 보였다.

천천히 오라고 했는데, 저렇게 뛰어올 필요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날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급하게 온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았다.

 

" 시형 씨, 왔어요? 수고 많았어요. "

 

" 추운 날씨에 밖에서 기다리지 말고 차 안에서 기다리시지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

 

" 제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걸요. 그리고 1초라도 더 빨리 시형 씨 보고 싶었거든요. "

 

습관처럼 남 듣기 좋은 말을 뱉었지만, 금세 얼굴이 빨개지는 시형의 볼에 손을 대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다가간다면 그가 피할게 분명하니까 열을 재는 척하며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고, 역시나 흠칫거리며 나의 행동을 주시하고 눈치를 보는 민시형이 오늘따라 귀엽게 보인다.

 

그를 차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뒤 조수석 밑에 있는 종이가방을 주려고 다가갔는데 눈을 질끈 감는 것을 보고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 감, 감사합니다.. 이런 거 처음 받아봐요.. "

 

선물을 받고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사람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감정들이 차분해지면서도, 민시형에게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생각을 하기 위해 재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당신이랑 같이 있으면 나 스스로가 편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아마도 나는 계속 당신과 만남을 주도할 테고 

가식적인 모습만을 그 앞에서 내보이며 호감을 얻으려고 할 테지.

 

차를 이동하는 중에도 옆에서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 민시형이 나쁘지 않았다.

남들 같았으면 목소리가 듣기 싫거나, 말이 너무 영양가 없어서 입을 닥치라고 했을 텐데 민시형이 하는 말들은 다 흥미로웠고, 그가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 알고 싶었으니까.

 

어떻게 살아가길래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했다.

어느덧 집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 그가 살고 있는 집 옆에 차를 세워두고 그와 인사를 하기 위해 그를 바라봤다. 

 

" 아쉽네요. 시형 씨랑 이야기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

 

" 저도 그래요.. 작가님이랑 있으면 편해지는 것 같아요. "

 

" 정말요? "

 

" 네, 정말로.. 작가님이랑 같이 있으면 편해져요. 고민도 다 사라지고, 즐거운 시간만 보내는 것 같아요. "

 

즐겁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을 봤을 때,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는 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아마 주말에 동생 군이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하지. 

생각한 대로 너무 착실하게 움직여주는 게 기특하기도 하고, 그것에 가차 없이 흔들리는 민시형이 안타깝기도 했다.

 

 

부스럭 -

 

품 안에 종이가방을 안고 꼼지락대고 있는 손가락이 보인다. 

그의 손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손마디 마디 사이에 손을 넣어 깍지를 껴보고 싶게 한다. 

직접적으로 닿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지 닿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 그런 말을 하면서도 속 안에 있는 고민은 털어놓지 않아서 조금 서운 하네요. "

 

" 티.. 났어요? 저 원래 티 잘 안 내는데.. "

 

" 제가 시형 씨한테 관심이 많아서 알아 차린 거죠. "

 

" 그.. 게 "


역시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동생이 충동적으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았는데, 정작 민시형 본인은 그저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착하고 순수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동생밖에 모르는 바보인 건지.. 아님 그냥 눈치가 없는 바보인 건지..

 

" 시형 씨. "

 

" 네? "

 

" 시형 씨랑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말이죠.. 음.. "

 

너무 순진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독이 된다. 

지금 같이 순수한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나 또한 민시형이 가지고 있는 선한 영향력을 탐내고 있는 사람 중 하나지만, 그래도 그에게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말을 해준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오지랖이라고 해도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이 피하고 싶고, 부담스러운 상황이 아니라 또 다른 추억을 새겨 넣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고 다가오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나에게 사랑을 하고, 마음을 열어도 된다는 말을 했듯이, 그게 어렵다면 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겠다고 말했던 그때처럼. 

 

 

훌쩍 - 

 

뭐야, 울어?

 

 

" 울어요? "

 

" 아, 아뇨.. 매번 작가님께 너무 좋은 말만 들어서요. "


울리려고 했던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와 닿는 게 있었다는 뜻이니까. 

앞으로 관계에 대한 좋은 작용을 했으면 좋겠네 더 이상 머리 아프게 돌아갈 필요 없이. 

 

평소에 하지도 않는 말들을 하느라 입에서 쥐가 날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시형을 보내주려고 하는데 갑자기 마음이라도 먹었는지 몸을 아예 틀어서 나를 쳐다보는 민시형과 눈이 마주쳤다.

 

 

" 작가님은..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세요? "

 

 

한참 어렸을 때,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항상 진부한 대사들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 왜 잘해주겠어, 좋아해서 그런 거겠지. 꼭 물어봐야 알아? '라는 대답을 하면서 채널을 돌렸던 기억이 나는데..

 

그 당시에 배우들은 항상 대답을 하지 못 한채 만남을 마무리하거나 웃음으로 대답을 하기 일수였다. 

직접 겪어보니까 알겠네,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없을 만큼 답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글쎄요?라고 되묻기엔 이 바보 같은 사람이 또 되물을 것 같고..

 

마음이 정해진 건 없었으나, 그가 오늘 내 앞에서 다른 남자의 개수작을 이야기할 때 유쾌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 꽃차를 준 것도 있고, 이야기를 들어준 것도 있으니 하나는 받아가야겠다 싶어서 운전석 의자 시트를 뒤로 빼곤 눈 앞에 있는 민시형을 꽉 끌어안았다. 

이 품에 뭐가 있길래 만났을 때부터 안아보고 싶다고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불쾌한 건 없다는 걸 알았다.

 

 

" 오늘은 친구로서 위로해주는 거지만, 앞으로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야기 꺼내면 화낼 거예요. "

 

" ㄴ, 네? "

 

" 나 질투 많거든요. "

 

" 저, 저, 조.. 아 하세요? "

 

" 많이 아낀다는 거죠. "



남들이 사랑을 하는 것처럼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거나, 눈물을 흘린다거나 안 보고 있으면 미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다른 사람과 아주 잠시 겹쳐 보일 때가 있지만 그래도, 아직 좋아한다는 단계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망할 이창경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라서.. 에리카에게 민시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던 날들도 아직까지는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당신만은 나를 좋아한다는 티를 내줬으면 좋겠어. 

 

 

 

 

- 권도 시점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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