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 1. 재미있네.
에리카의 바에서 연락을 한 이후에 민시형과의 대화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정확하게는 민시형과의 약속을 취소한 이후에 그의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 행동이 나를 곤란하게 하거나, 선을 넘는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편의를 더 생각했으며, 민시형 자신이 생각하는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처음부터 경계를 하길래 그 경계를 풀기 위해서 다정한 척은 다 했더니, 약속 하나로 원점이 되어버렸다.
귀찮게 됐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더이상 작업을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작업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팔에 손을 넣고 팔짱을 낀다.
어떤 새끼가 분위기 안 보고 눈치 없이 행동하는 거지?
" 권도! 오늘 물 좋은 곳 있는데, 같이 갈래? "
" 선약이 있어서. "
" 음? 나랑 만나 놓고 무슨 선약이야. 괜히 빼고 그러네? "
끝이 안 좋았던 놈들은 항상 주제도 모르고 이렇게 선을 넘는다.
단 한 번 잠을 자고, 그 밤이 좋아서 잊을 수 없다는 진부적인 대사와 명함을 건네는 사람들.
그런 종족들을 곁에 오래 두면 본인들이 애인처럼 관섭하려고 들고, 끝내는 감정을 털어놓는 게 대부분이다.
그래도 이번엔 좀 빨랐다.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놈은 빨리 잘라내야지.
" 네가 멋대로 작업실 앞에 있었던 거지. 너와 약속을 잡은 적은 없는데? "
"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 그럼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
"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
" 응? "
이런 새끼들은 웃으면서 말하면 대부분 못 알아듣는다.
좋게 말할 때 알아서 눈치 봐서 떨어져 줬으면 좋겠는데.
이권도는 자신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의 팔을 부드럽게 빼내곤,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남자의 코 앞까지 다가와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는 행동에 얼굴이 붉어진 남자가 이권도에게 안기려고 했으나, 갑자기 뒷머리를 거칠게 움켜쥐는 이권도 때문에 안기기는커녕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이권도를 쳐다본다.
" 꺼지라고, 씨발아. "
" 무, 뭐?! "
거칠게 머리를 움켜쥔 손이 떨어져 나가고 곧이어 눈물이 고인 채 이권도에게 욕을 퍼붓는 남자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리를 빠져나간다.
작업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까지 쫓아올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눈치를 챘는지 작업실 앞에 서 있는 모습 조차 보이지 않는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작업실에서 바로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이런 기분으로 집에 가면 더 재수 없을 것 같아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를 확인해 보지만, 오늘은 남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또 재수 없이 이상한 사람이 꼬이면 기분만 더 더러워질 테니까.
뭘로 기분 전환을 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민시형이 떠올랐다.
' 저, 저는 작가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
카페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말에 갑자기 이상한 말을 꺼낸 민시형.
처음에는 입단속을 시키는 줄 알았다는 황당한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오해가 풀리고 그와 이야기를 나눴을 때
나름 즐거웠다.
뭐 하나 뛰어난 거 없고,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그가 하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고, 그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말에 불러낸 건데, 오히려 동정을 받아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다가갈 수 있다면 어떤 형태든 호감을 받아내는 것이 중요하니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질척대지도 않고, 또 다른 호감을 표하지도 않았다.
적당한 선을 지켜 이야기를 하고, 내 기분에 맞춰서 행동하는 사람.
그래서 좋게 보였나?
" 카페나 들려서 가야겠군. "
그를 생각하기만 했는데, 더러웠던 기분이 조금 사라진 것 같다.
물론, 앞으로 다시 신뢰를 쌓고 더 살갑게 대해야 하는 건 귀찮겠지만, 그런 시간들이 별로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삶을 살아가면서 늘 똑같은 패턴 속에 살아가기엔 지루하지 않나?
그래서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잠을 자고..
차에 시동을 거는 중에 코트 소매에 무언가가 묻은 게 보였다.
그 눈치 없는 놈이 바르는 핸드크림이 아무래도 묻은 것 같은데.
" 기분 또 더러워졌네. "
카페에 들려서 디저트를 사고, 집에 도착하면 코트부터 버려야겠다.
-
주말이라 그런지 복잡한 거리를 지나서 한산한 곳에 차를 세웠고, 내 곁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지나쳐 카페에서 주문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던 길이었다.
차를 세워놨던 곳이 공원인데, 멀리서 벤치에 앉아 서로에게 기대어 다정하게 데이트를 하고 있는 커플을 보고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고, 지금 저들이 느끼는 감정 또한 알지 못 하지만 사랑에 죽고 살고 하는 자들을 보면 우습기만 하다.
남 비유 맞추면서 살기에는 아까운 세상인데, 내가 가진 것을 나눠 주고 결국 끝에는 헤어짐에 서로에 대한 원망과 미련만 남는 게 사랑이라면..
" 별로 특별하게 보이지는 않는데. "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민시형은 분명히 그의 마음속에서 남는 사랑을 해봤을 것이다.
굳이 연인 간의 애정이 필요 없는 나라도,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얼마나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는지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지금 혼자다.
결국 사랑이란 것은 미련 속에 남아 되새김질만 하는 것일 뿐이니까.
영원할 수 없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거움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
사람과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다지만, 즐거움은 돈으로 살 수 있으니..
잃는 것도 없는 게 더 좋은 것 아닌가?
오랜만에 느끼는 싸구려 감상을 끝내고 그 커플들을 지나쳐 차에 타려고 했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멀리서 봐서 몰랐지 조금 가까워진 거리에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니 민시형이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럼 새로 만난 애인인가?
그래서 연락의 빈도가 줄어들고, 선을 긋는 건가?
기분 전환하려고 왔던 길인데, 다시 기분이 잡치다 못해 짜증이 난다.
그들을 방해할 생각은 없지만, 핸드폰을 들어 민시형에게 문자를 넣으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발견한다.
곧장 나에게로 오려고 했지만, 갑자기 손이 끌려 가지도 못 하고 서있는 민시형이 보인다.
애인이라면 뭐,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임자 있는 사람은 건들지 않는데.
저렇게 대놓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니까 더 방해하고 싶어지잖아?
" 작가님..! 여긴 무슨 일이세요? "
" 일 끝나고 기분 전환하고 싶어서 왔어요. 시형 씨는 데이트? "
" 아, 아뇨?! 동생이랑 왔어요. 저번에 말했던 그 동생이요. "
" 아하.. "
애인이 아닌데, 나를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니 알게 되었다.
민시형을 마음에 두고 있는데, 겨우 그 자리 하나 지키고 싶어서 으르렁 거리는 저 녀석의 모습이 꽤 우스워서 웃음이 나온다.
하긴, 동생이라는 자리 조차 뺏긴다면 시형 씨 옆에서 서 있을 수 없으니까.
그래도 동생은 겨우 동생일 뿐이지..
그와 뭔가의 감정이 일어날 수 있는 위치는 아무래도 내가 더 유리하지 않겠는가?
" 많이 추웠겠다. 시형 씨 저번에 약속 취소해서 미안해요. "
" 아.. 그, 괜찮아요! 작가님이 많이 바쁘셨을 수도 있죠. "
나를 경계하는 남자가 쓸었던 머리칼을 내 손으로 쓸어 넘겨줬다.
그가 남긴 흔적을 하나하나 지워서 내 흔적으로 다시 덮었고, 집에 가서 먹으려고 했던 디저트를 시형의 손에 쥐어줬다.
" 미안해요. 많이 서운해하는 것 같아서.. 이거라도 먹어요. "
" 아뇨 아뇨! 작가님이 드시려고 산 건데, 제가 뺏을 수 없죠! "
" 사실, 카페도 시형 씨 생각나서 온 거예요.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딱 마주쳤네요. "
" 그, 그래도 저 괜찮은데.. "
나의 선의에 곤란해하는 그가 마음에 든다.
매번 받아내기만 하고, 제대로 된 결과물을 가져온 적이 없는 인간들만 봐서 그런지, 내가 뭘 줘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내고, 의미가 담기지 않은 선의로 다시 베풀어 주는 시형이 마음에 든다.
" 시형 씨도 만나고 기분 전환도 해서 고맙다는 인사로 드리는 거니까. 받아요. "
" 다음에 만나면, 제가 더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그곳 말고도 좋아하는 디저트 카페가 많거든요. "
" 정말요? 차 가져왔는데.. 지금 당장 가는 건 곤란하겠죠? "
" 오늘은 제가 선약이 있기도 하고.. 작가님도 일하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
" 난 시형 씨랑 있으면 이상하게 힘든 것보단 힘이 나더라고요. "
" 그게.. "
나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냥 요즘 연락도 자주 안 받고, 나 말고 다른 사람과 만나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좀 짜증이 나서 심술을 부리는 것뿐이지. 다른 의도는 없었다.
장난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싶어서, 웃으면서 그를 보내주려고 했는데 멀리서 굳은 얼굴로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 형.. 날씨도 추운데 들어가자. "
조심스럽게 옷 깃을 잡아 끄는 남자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나를 경계했으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형을 조르는 일뿐이라니.
상대가 너무 시시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 시형 씨께 이야기 들었는데, 동생이라고 아끼고 보살피길래 학생인 줄 알았는데.. 성인분이시네요? "
" 형이 절 많이 아껴서 그렇습니다. 가족과도 같은 사람인데요. "
" 이야기 들어보면 가족보다 더 깊은 사이라고 느껴질 정도더군요. "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비꼬는 것을 알았는지, 시큰둥하게 대답하면서도 말에 힘을 주고 말하는 것을 보니 확실하게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가족은 그저 가족일 뿐이지, 어느 누가 가족을 이성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게다가 민시형의 성격에 절대로 동생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이성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남의 연애에 치정극 대상으로 선정되는 것은 골치 아프지만, 주인이 없다면 치정극이 아니라 로맨스가 되겠지.
" 다음에 뵐게요 작가님. "
" 오늘 연락할게요 시형 씨. "
나의 말에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곧이어 표정이 더욱 구겨지는 남자를 보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오늘 나를 만나서 많은 것이 달라졌으면 좋겠지만, 동생 군께서 기회를 얻기 위해 별 짓을 다 하겠지.
하지만, 민시형이 생각해놓은 선을 넘는 다면 그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그들 사이에 벽이 생길 테니.
나는 그 벽을 파고들면 되는 것이다.
" 이래서 어린것들은 너무 알기 쉬워서 재미없어. "
기분 전환을 위해서 산 디저트는 손에 없지만, 다른 방법으로 기분을 전환했으니, 기분 좋게 집으로 향했다.
현재 일을 하고 있는 작업실과 살고 있는 집의 분위기는 딱히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가구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편하다고 생각이 든적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 들어와서도 편히 쉴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지금까지 느끼지 못 한 피곤이 몰려드는 것 같았다.
늘 집에 오면 작업실에서 느꼈던 피로를 그대로 끌고 와도 편하게 잠들 수 없었는데, 오늘은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워서 쉬고 싶었다.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샤워를 하고 대충 머리를 털고 안경을 쓴 채 침대에 앉았다.
자기 전에 민시형에게 문자를 보낼까 싶었지만, 지금쯤이면 형에게 안겨 어리광 부리고 있을 그를 생각해서 핸드폰을 덮고, 집 안에 켜 둔 모든 전등을 끈 후 단 하나의 스탠드만 켜놓은 채 태블릿으로 작업물을 하나씩 확인하던 중에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지잉 -
지잉 -
혹시나 시형에게서 온 연락인 줄 알고 화면을 확인했지만, 기다리는 연락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시하려는 순간 문자의 주인에게서 전화가 온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을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연락한 사람은 적당히 눈치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귀찮게 구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화를 수락하자마자 스피커로 바로 연결이 되어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
" 이권도~ 바빠? "
" 집. "
" 나중에 만날래? "
" 작업해야 해. "
에리카의 소개로 우연히 만나게 된 이창경.
에리카는 프라이빗 바를 운영하면서 질이 나쁜 사람들을 골라서 나에게 알려주기도 했는데, 반대로 한 번 만나면 좋을법한 사람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중 소개를 받았던 사람이 지금 전화를 하고 있는 창경인데, 만나자마자 잠자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고 에리카의 바에 가기만 하면 창경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이야기를 하는 빈도가 잦아지고 대놓고 호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잠자리를 가지고 난 이후로도 문제없이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
" 아 왜~ 내가 술 사줄게 "
" 돈 있어. 그리고 요즘 바빠. "
"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지 별다른 마음이 있어서 물어보는 게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계속 캐묻는 녀석이 짜증 나서 결국 만나는 것으로 하고 통화를 마쳤다. 창경과 관계를 맺을 때는 딱히 불편한 것도 없고 만족스러운 것도 없으니..
중간에 에리카에게서 뭔가를 들었다는 듯이 말하는 걸 보니, 바에서 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내 이야기가 나온 거겠지.
앞으로는 에리카 앞에서 헛소리는 안 해야겠군.
내일 작업하기 위한 사진들을 천천히 살펴본 것도 1시간이 지났지만, 시형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질 않는다.
먼저 연락하겠다고 했던 사람은 본인이지만, 굳이 오늘 연락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연락하지 않았다.
뻔히 보이는 답에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은 이만하고 잠을 청하는 게 적당할 것 같아 싶어, 방 안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던 불빛 또한 끄고 안경을 벗은 채 몸을 눕히자 얼마 가지 않아서 잠에 빠져들었다.
꽤 오랜만에 이권도의 방 안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