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가려고 했는데 일상이 없어졌습니다..?
" 윽, 몇 시지.. "
알람에 의존해서 일어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눈을 뜬 건 오랜만인 것 같다.
자기 전에 분명 아무렇지 않았던 팔이 너무 저려서 불편한 감각에 눈을 떴는데, 언제부터 안겨 있었던 건지 내 품에 안겨 세상모르고 잠에 든 수열이가 보였다.
긴 속눈썹에 잘 정돈된 눈썹, 곱슬끼가 있는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주고 예전에 했던 습관처럼 그의 이마에 여린 입맞춤을 남기고 주변을 둘러봤다.
암막 커튼을 쳐놔서 그런지 지금이 몇 시인지 밖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주 작은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니 아침이 지난 지 꽤 된 것 같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지금이 몇 시인지 알고 싶어서 남은 팔 하나를 침대 밖으로 빼내어 선반 위에 있는 핸드폰을 찾으려는데 거리가 꽤 멀어서 닿지 않는다.
으음..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움직이면 수열이가 깰 것 같고,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에 그냥 수열이가 일어날 때까지 자고 있는 그를 구경하기로 했다.
어제도 자기 전까지 수열이 장난을 받아주느라 몇 번이고 이 좁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지만, 그때마다 내 허리를 잡아 일으켜 세워주고 다시 장난을 치는 수열이 때문에 정신없이 웃었던 것 같다.
물론 매번 심장이 해로울 정도로 두근거림을 느꼈다는 것은 비밀로 한 채 말이다.
수열이가 깨지 않게 몸을 돌려 자세를 잡고 그를 관찰하기 최적화된 상태로 하나하나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갈색이 맴도는 머리지만, 분명 흑발도 잘 어울릴 거고 탈색 머리도 잘 어울리겠다.
외모를 가꾸는 일에 관심이 없는 수열이지만.. 그래도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 그래? 그럼 해볼게. ' 라며 바로 실행할 것만 같다.
머리가 곱실거리는 것도 귀엽지만, 차분하게 내린 머리라던가 정반대로 이마를 드러내는 머리도 그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 가만히 있어도 호감형인데 마음먹고 꾸민다면 이권도만큼이나 세련되고 어른스러워 보일 것 같은데..
수열이를 보고 있다가도 슬며시 이권도의 모습이 떠오르는 거 보니까 아무래도 이권도가 내 취향에 더 가까웠나..?
예전에는 볼살도 적당하게 있어서 만지는 재미가 있었는데.. 틈만 나면 붉어진 볼이 귀여워서 자꾸만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볼살이 보이지 않고, 날렵하게 자리를 잡은 턱선이 눈에 띈다.
그 위에 위치한 입술은 겨울이라 그런지 살짝 터버린 게 안쓰러워 나중에 걸어가는 길에 약국이라도 있으면 립밤이라도 사줘야겠다.
" 어쩜 이렇게 잘 컸을까.. "
쓰다듬고 싶었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수열이가 자는 것에 방해가 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로 그냥 빤히 수열이만을 쳐다봤다.
얼굴을 하도 뚫어져라 봐서 그런지 다른 곳으로 시선이 향하는데..
진짜로 벗고 자겠다는 수열이를 말렸지만, 나중에는 불이 꺼진 상태에서 답답하다고 빌려준 티셔츠를 벗고 말았다.
제일 큰 사이즈를 줘도 가슴이 답답해서 눕는 게 불편하다는 말에 차마 억지로 입힐 수는 없었으니 알겠다고 했는데..
옷을 입는 모습만 봤고, 어제저녁에는 불이 꺼진 어두운 상태라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몸이 엄청 좋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실제로 이렇게 자리를 잘 잡은 복근은 본 적이 없다.
매번 아이돌 영상이나 모델 잡지에서만 봤지 그리고
그.. 동영상에서만 봤지..
실제로 이런 몸은 처음 보는데..
와 저거 진짠가..?
만져보고 싶은데 자고 있는 사람을 성추행하는 건 좀 아니잖아..!
그렇다고 수열이가 일어나자마자 ' 복근 만져봐도 돼..? '라고 물어보면 날 얼마나 이상한 사람 취급하겠어.
근데 진짜 만져보고 싶다.
그가 숨을 쉬는 대로 올라가는 가슴팍과 살짝 들떠오르는 근육들이 너무 자극적이기도 했고, 같은 남자로서 너무 관리를 안 한 건가 싶어서 살짝 입고 있던 옷을 들춰 내 몸을 확인했다.
보지 말걸.
만지지도 못하는 감 보기만 하자라는 생각으로 이불을 살짝 들추니
이번에는 탄탄한 배 밑에 위치한 트레이닝 바지와 그 위로 드러나는..
" 형. "
" 어!? "
걸렸다.
이번 100% 걸렸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겠지?
아 진짜 욕심내지 말고 조금만 볼 걸..
애초에 보지 않았으면 되는 건데 내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자꾸 봤는지..!
이득.. 이득이 있었긴 있었지!
너무 놀란 마음에 손에 쥐고 있던 이불을 놓쳐버렸고,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너무 대놓고 몸을.. 그리고 하반신을 보고 있었다는 걸 들키고 말았는데..
사과부터 해야겠지?
아니 사과하면 더 이상하잖아.
아니다 이 상황에서는 사과하는 게 맞아. 그리고 변명을 하든 거짓말을 하든 하자.
" 그게.. 내가 있지.. "
" 형.. "
설마 잠이 덜 깼나?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주 작은 희망을 걸어보며 주저리를 시작하려는 순간, 이번엔 수열이가 자신의 손으로 이불을 살짝 걷어 보인다.
탄탄하게 자리 잡은 복근과 아침이라 그런지 약간 솟아오른 트레이닝 바지가 보였고
이게 무슨 뜻인가 싶어서 얼어버린 상태로 그를 바라보자.
" 형이 내 몸 좋아해 주는 거 나도 좋아. "
" 어..? "
" 만져 보고 싶어? 만져볼래? "
화악 -
수열이는 잠에서 덜 깬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착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명백히 내가 자신의 몸을 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다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몸을 좋아해 주는 내가 좋다고 말해주고 있다.
게다가 만, 만져보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 둘 사이에 어떠한 스킨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보다 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얼굴이 거의 빨갛게 익어가고 있는 게 느꼈다.
정신 차리자 민시형, 아침부터 이런 문란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네가 이 모양인 거야!
나에 대해 수열이가 오해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뭐, 뭘, 만지게 해 준다고 정말 만지려고 하는 거야!
" 아, 아니야!! 아침 훌쩍 넘었겠다! 우리 나가서 점심 먹어야지! 형이 먼저 씻, 아.. 아니 수열이가 먼저 씻을래? "
지금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뛰쳐나가서 얼굴에 남아 있는 열기를 빼고 싶었다.
하지만, 나보단 지금 수열이가 더 급할 것 같은데..
" 하아.. 그럴까? "
" 어.. 어, 어! 형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씻고 와! "
" 어차피 예전에 다 봤는데.. 같이 씻으면 안 돼? 기다릴 필요 없잖아 "
" 안.. 안돼 "
" 왜애.. "
순진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몸이 나를 덮쳐온다.
내 어깨에 얼굴을 딱 붙이고, 마치 죽부인처럼 나를 안아 드는 수열이가.. 귀엽,
닿는다.
닿는다고..!
어떻게든 뇌에 힘을 주고 그를 밀어내며 억지로 그를 화장실 앞까지 끌고 와 집어넣었다.
일회용 면도기와 칫솔을 손에 쥐어주며 그를 다독이고 문을 닫았지만, 안에서 강아지처럼 낑낑대는 수열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몰차게 말하고 그에게 등을 돌렸다.
" 우리도 다 컸고 어릴 때랑은 다르니까 어서 씻고 와 최수열! "
" 달라진 거라곤 사이즈뿐인데.. "
" 최수열!! "
닫힌 문 너머로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거 보니 장난이구나 싶어서 문을 주먹으로 쾅 내려치니 또 안에서 좋다고 꺄르륵거린다.
얄미운 녀석..
수열이가 나오기 전에 침대 위를 정리하다가 잊고 있던 핸드폰을 찾았고,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켰다. 11시 13분을 띄우고 있던 화면과 윤지에게서 온 카톡 학원 원장님, 그리고.. 이권도 그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그래도.. 친구가 된 줄 알았는데 조금 아쉽긴 하다.
" 형, 뭐해? "
" 어? 깜짝이야.. "
언제 씻고 나왔는지 물기에 젖은 수열이가 뒤에서 나를 안는다.
내가 쓰던 바디워시가 이런 향기가 났던가..?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수열이에게서 나는 향기가 좋다고 느껴질 때 즈음
수열이의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내 어깨를 타고 내려와 아래로 툭툭 떨어진다.
" 형... 나.. "
" 으응..? "
" 안에 속옷 안 입었는데.. "
묘하게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수열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분히 나의 뇌를 정지시킬만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렇다면 지금 내 뒤에서 겨우 바지 하나만 걸치고 그러고 있다는 소리인가..?
얘가 오늘따라 사람을 꼬시려고 작정한 건지 당황하다 못해 혼란스럽다.
하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에서 흐르는 물방울을 털어주고 새로운 속옷과 스스로 머리를 말릴 수 있게 드라이기까지 쥐어줬다.
" 자. 이걸로 갈아입고! 감기 걸리면 힘드니까 머리 말리고! 형은 씻고 올게 알았지!? "
착하지 수열아?! 너는 다 할 수 있지?!
형이 부디 편하게 샤워를 끝마칠 수 있게 네가 꼭 좀 도와주라..?
다행히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가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옷을 갈아입는 것 같았다.
씻는 동안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지...
수열이랑 같이 있으면 나까지 말려들어서 이상해질 뻔했으니까.
화장실에서 나왔을 땐 수열이가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난 상태였고, 나도 크게 신경 쓸 건 없었으니까 머리만 말리고 옷을 갈아입으면 준비가 끝난다.
부디 얌전히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기를 바랐지만, 내가 머리를 말리려고 할 때 기다리듯이 튀어와서 머리를 말려주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할 때는 기어코 방 안에 있겠다는 걸 겨우 달려서 밖으로 내쫓았다.
혼자서 있을 때는 10분도 안 걸리는 준비가 오늘은 40분이나 걸렸다.
아침부터 기운이 쫙 빠지는 건 오랜만인데.. 나가자마자 밥부터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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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나오자마자 초밥집으로 향했고, 점심시간이라 붐비는 사람들을 피해 겨우 자리가 나와 앉을 수 있었다.
재미 있었던 건, 음식을 주문하면서 흘끔 거리는 알바생과 음식이 나오자마자 맛있게 먹고 있는 수열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었 것 그리고 장소가 좀 그래서인지 다들 다가오지 못하고 수열이의 얼굴만 구경하고 밥 먹고 나가는 식이었다.
" 너도 참 피곤하게 살겠다. "
" 웅? "
초밥을 두줄이나 먹고도 배가 안 찼는지 말차 밀크티를 빨대로 마시고 있던 수열이가 나를 보며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답했다. 원래 잘생긴 사람들은 자기가 잘생긴 거 모른다더니, 네가 그 과구나..?
모르면 됐다는 대답을 뒤로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상가를 구경했다.
겨울 시즌이라서 그런지 곳곳에 눈 장식과 작은 조명들을 걸어놓은 가게가 많았고, 길거리에 나와 있는 물품들도 겨울을 맞아 아기자기한 눈사람이나 빨간색이나 초록색으로 이뤄진 소품들을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볼거리가 많아 눈이 즐거웠고, 무엇보다 수열이가 다리도 길어서 보폭이 나보다 넓을 텐데 조금이라도 앞서가려고 하면 다시 나에게 보폭을 맞추는 귀여운 모습도 볼 수 있었다.
" 형, 다리 안 아파? "
" 조금 아픈데.. 주변에서 사진 찍고 싶었는데 사진기가 안 보이네.. "
내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조금만 참으란 말을 하고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가기 시작한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를 지나서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골목 끝에 위치한 작은 호숫가로 간다.
이 번화가 주변에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기 때문에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수열이를 바라보니 나에게 싱긋 웃어준다.
조경도 너무 예쁘게 잘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꽤 잘 가꿔진 걸 보니 만들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았구나..
" 이리 와. "
"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어? "
수열이가 벤치로 나를 이끌고 자신의 옆에 앉힌다.
많이 걷지도 않았는데 나 역시도 수열이에게 보폭을 맞출 때가 있어서 그런지 오늘은 좀 힘들었나 보다.
" 형 씻고 있을 때 찾아봤어. "
" 오구.. 내가 좋은 곳 데려가 줬어야 했는데. "
" 형이랑 있으면 어디든 다 좋은걸 "
가끔은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하다가도 이렇게 어른스럽게 굴 때가 있다.
어느 때는 나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가련한 얼굴을 하고, 또 다른 날은 나보다 더 능숙하게 구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내가 아는 수열이는 작고 어렸던 아이인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수열이는 나 없는 시간을 지내오고 그 시간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고 찾아왔던 사람이다.
이제는 그 시절의 어린아이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커버리고 능숙해진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하면서 이따금 나에게 안겨오거나 애교를 부릴 때는 또 나밖에 모르는 동생처럼 보인다.
" 나 없는 동안 뭐하면서 지냈어? "
" 그냥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학교 졸업하고.. 친구들도 사귀고.. 또 싸우기도 하고 그랬지. "
" 그런 이야기 말고, 형한테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없어? "
내가 없는 시간 속의 수열이가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의 몰랐던 부분을 마주할 때마다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심장이 요동치고, 설렜던 적이 수없이 많았다.
" 내가 없는 동안 애인을 사귀었다던가.. 뭐 정말 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던가 반대로 너무 사랑했던 사람이 있다던가.. 아니면 기억에 남는 일이라도 다 좋아. "
이렇게라도 수열이가 지냈던 시간을 알 수 있다면 그의 앞에서 버벅대거나 당황하는 시간도 줄어들지 않을까?
수열이는 분명 일반적인 사랑을 할 테고, 앞으로도 나에게 지내면서 도움을 요청할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그를 가슴에 묻고 이야기를 들어주기엔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차근차근 형으로서 그리고 또 하나의 가족으로서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
그때의 그 술자리처럼.. 갑작스럽게 튀어나올 뻔 한 내 욕심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를 아껴주고 조언해줄 수 있는 조언자와 든든한 지원자로서 말이다.
" 때려주고 싶은 사람.. 있었어. 근데 이제는 밉지 않아 앞으로 볼 이유도 없을 거고 마땅한 벌을 받고 있을 테니까. "
" 내가 그 당시에 곁에 있었으면 같이 화라도 내줄 텐데.. "
" 형은 착해서 못 했을걸? "
" 아무리 그래도 내 동생 괴롭힌 사람인데 당연히 혼내줘야지. "
내 말에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수열이의 눈이 나를 향한다.
너무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운 마음에 순간적으로 눈을 피해버렸다.
" 그래도 너 스스로 용서했다는 게 대견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나중에 그런 사람 생기면 형한테 말해. 혼내줄게! "
" 알았어. "
눈을 피했다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다시 말을 이어가는 수열이와 그의 모습을 흘끔흘끔 바라보는 나.
아침에 짓궂은 모습은 어디 가고 지금은 무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내가는 것이..
내가 없는 동안 많은 삶을 이겨왔고 보내왔구나 싶다.
" 오구.. 내 동생 이리 와 안아보자 "
" 응.. "
무뚝뚝하게 말을 하고 있어도 힘들긴 힘들었는지 안기라는 말에 내 가슴에 바로 고개를 파묻는다.
그가 말하고 싶은 감정이나 말하고자 하는 말을 다 듣지 않았지만 강하다가도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내가 그를 껴안기에는 덩치도 작고 큰 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좀 불편한 꼴이 돼버렸지만 그래도 한 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그의 머리칼을 어뤄만져 줬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둘이서 편히 이야기할 수 있었고, 우리가 서로를 껴안고 있거나 마주 보고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기대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 그럼 반대로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어? "
"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많아. 근데 다 오래 못 갔어. "
" 네가 차였어? 설마 우리 수열이가 차일 인물은 아닌데.. "
" 꼽을 정도만 내가 차고 나머지는 다 차였어. "
" 와.. 너 연애 많이 했나 보다? "
하긴 수열이 얼굴에 연애를 안 했을 리가 없지, 게다가 이런 얼굴을 가만히 두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문득, 수열이는 어떤 연애를 할까 궁금해졌다.
수열이가 사랑에 빠진다면 어떻게 사랑을 표현할까.
상대방에게 얼마나 잘해줄까..?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그래도 더 이상 물어보면 너무 관심 가지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을 테고..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실례겠지.
" 내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은 아니라서.. 다들 실망하더라고 "
" 네가 남에게 굳이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지. 그들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기보단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
" 곁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잘 대해줬는데, 내가 마음을 열지 못했어. "
" 괜찮아. 각자가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고, 느끼는 감정이 다른 것처럼 수열이도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
" 늘 특정한 대상만 바라보고 있어서 더 마음을 못 열었나 봐, 조금이라도 닮으면 내가 먼저 매달렸는데.. 결국은 그 사람이 아니라면 안 되겠더라고. "
아마도 수열이가 말하는 ' 그 ' 사람은 술자리에 울면서 찾았던 사람일 것이다.
누군지 몰라도 이렇게 맹목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게 부럽다.
" 그래도 남을 상처 주는 일은 하지 말자. 수열이도 그리고 그 사람들도 아플 거야. "
"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
" 형이 도와줄게. 네가 뭘 못하겠어 안된다면 내가 도와줄게. "
나는 수열이가 상처 받고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사랑에 자신이 없어서 가진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고 저무는 꽃 또한 지나칠 수 없다.
그리고 수열이니까.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수열이니까.
더더욱 울게 할 수 없는 걸..
" 형은 수열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걸 보고 싶어. 그럼 나도 행복할 테니까 우리 행복을 위해서 도와줄게. "
" 형은 내 곁에서 이렇게 있어주면 돼. 그게.. "
지잉 -
지잉 -
" 앗, 미안.. "
" 괜찮아. "
수열이가 이어서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울리는 진동 소리에 놀래 핸드폰을 확인했다.
하지만 진동 소리보다 더 놀랠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서 연락이 왔다.
[ 이권도 작가님 ]
' 우연히 시형 씨랑 닮은 사람을 본 것 같아서 연락해봤어요. '
' 혹시 지금 xx 거리 쪽 공원 벤치에 앉아 있어요? '
그가 보낸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까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있었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이권도가 보였다.
저 사람이 왜.. 저기에 있지?
아니,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