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어제 수열이를 만나서 간단하게 안부만 묻고 거의 자리를 도망치다시피 나왔다.
따라오고 싶어 하는 수열이의 눈빛을 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래, 다음에 만나면 예전처럼 형, 동생 할 수 있는 사이가 될 거야.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윤지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내일 보자고 약속을 잡자마자
그녀 역시도 연락을 줄 예정인데 전화를 줘서 고맙다는 어리둥절한 답변을 들었다.
무슨 이유로 나를 보자고 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 사정이 더 급한 것 같아서 알겠다는 답변을 마지막으로
소란스러운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 형, 잘 자고 또 봐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좋은 밤 보내요♥ '
하트까지 붙여져 있는 문자 수신을 보고 또다시 오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형에게 보내는 저녁 인사일 뿐일 텐데, 얼른 내일 윤지에게 말하고 마음을 다 털어놓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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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좋은 아침! 🥰 '
눈을 뜨자마자 빛나는 화면 안에 담긴 귀여운 아침인사.
역시나 수열이가 보냈기에 나도 아무렇지 않게 ' 좋은 아침 행복한 하루 보내! '라고 답장을 주곤, 바로 집을 나섰다.
점심시간이라고 하기엔 좀 이른 시간이라 여유로웠던 거리를 지나쳐 윤지와 만나기로 했던 카페 앞에 도착했다.
좋아하는 녹차라테를 시켜놓고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천천히 구경하고 있는 와중에 익숙한 얼굴이 바쁘게 카페 안으로 들어온다. 윤지다.
" 아 미안, 미안! "
" 우선 음료부터 시키고 와. "
카운터로 바로 다가가 음료를 천천히 보고 있는 그녀의 손에 얼마 전에 맞췄다던 커플링이 보인다.
화려하지 않아도 연인의 표식처럼 자리 잡은 반지의 위치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것 같았다.
행복한 사랑을 하고 있는 커플이겠구나. 하고 말이다.
" 그래서, 바쁘디 바쁜 민시형 씨가 나를 왜 보자고 했을까? "
" 다름이 아니라, 네가 매번 나보고 애인 사귀라 그래서.. "
" 그래서? 애인을 사귀었어? "
" 아니, 그건 아니고.. "
" 에이 그럼 또 나보고 잔소리하지 말라고 하려고? "
" 이번엔 진짜로 곤란했단 말이야.. "
어제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과, 수열이를 보면서 갑자기 두근거렸던 상황을 말하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다 못해 얼굴이 기괴해질 정도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보였다.
남은 심란해 죽겠는데, 늘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곤경에 처해있을 때 저렇게 웃고들 있다. 나쁜 놈들..
" 어이, 민시형 씨~ 내가 보기엔 수열이가 널 엄청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데? "
" 알고 있어.. 수열이 어렸을 때부터 나 좋아했거든. "
" 아니.. 이 사람아 의형제 이런 게 아니라. "
윤지가 주문한 아이스티가 담긴 유리병에 맺힌 물방울들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빨대를 꽂은 채 휘휘 젖는 움직임에 무수히 많은 물방울들이 흘러내려 테이블 밑에 작은 웅덩이가 생긴다.
그리고 그 물방울들이 모여 모여 휴지를 흠뻑 적실 웅덩이가 만들어진다.
내가 빤히 유리병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윤지가 내 눈앞으로 검지 손가락을 불쑥 내민다.
깜짝.. 놀랬다.
" 남자. 사랑의 감정으로 보고 있다고 널. "
" 남자? 난 남자가 맞긴 하는데.. "
" 아오 씨!! 연애하고 싶어 한다고 걔가 너랑! "
" 나, 나랑? "
수열이가 나랑 연애를 하고 싶어 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늘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같이 씻고, 그런 일들을 친한 사람들끼리 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피어날 순간들은 아닌 것 같은데..
친구라면 친구고, 형제라면 형제일 사이가 어떻게 연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젓고 녹차라테를 쭉 빨아보지만, 그녀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곤 나를 바라보고 있다.
" 에휴.. 이러니까 네가 타이밍도 못 잡고 사람도 못 잡는 거야. "
" 수열이랑은 안돼. "
" 왜 안돼? "
" 동생이거든. "
" 너 연상이 취향이야? "
" 아니.. 그 말이 아니라.. "
연상 연하 동갑 이런 건 상관없었다.
나를 이해해주고, 그냥 평범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나이가 무슨 소용인가.
그래도 수열이는 안된다.
수열이는 가족이자 동생이니까..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사랑과 우정을 헷갈려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형이니까.
내가 잘 행동한다면, 수열이도 나도 곤란해질 상황은 없을 것이다.
" 에휴, 됐다. 그건 그렇고 너 이번 주 주말에 바쁘냐? "
" 도서관 가려고 했는데? "
" 이번주 주말에 전시회 하나 있는데 가자. "
" 으음.. "
" 네가 좋아하는 사진 보러 가는 거야. 빼지 마라. "
" 아? 그.. 이권.. "
" 이권도 전시회 보러 가자고. "
그러고 보니 그때 눈을 마주치고 난 이후에 아무 일도 없었긴 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그 사람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저번 전시회에 갔을 때는 같은 대학교 선배라고 했었는데..
" 알겠어. "
" 이쁘게 입고 오지 마. "
" 으응..? "
" 이권도가 너 물어봤단 말이야. "
" 근데 윤지야.. 너는 그분이랑 많이 친해? "
" 아니? 예전에 권도 선배가 일하던 곳에서 같이 일해서 그래. "
" 그랬구나.. "
" 뭐야 그 반응은? 아니 됐고! 그냥 평범하게 입고 와! 알겠지? "
그녀를 만난 지 벌써 4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그녀가 말하는 예쁨과 멋짐 그리고 평범을 알 수 없다.
건물 안은 따뜻할지 몰라도 이동할 때 날씨도 추운데 스웨터나 입고 가야겠다.
-
집에 돌아왔을 땐 몰랐는데 수열이가 사진을 보냈었다.
메신저에선 오늘 점심에 뭘 먹었는지 뭘 하고 놀았는지 등등을 말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얼굴이 나와있는 셀카를 찍어서 보낸 것이다.
수열이 뒤로 모르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내가 알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보기 좋아 갤러리에 사진을 저장했다.
물론 얼굴이 잘생긴 것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동생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지내는 모습은 꽤 생소하게 보였고.. 또.. 음, 모르겠다.
' 형! 도서관 또 언제 가? '
' 주말에 같이 도서관 갈래? '
' 형 바쁘면 잠깐 밥만 먹고 헤어져도 괜찮은데.. '
' 혀엉.. 😫 '
내가 읽지도 않고 답장도 없으니 속상했는지 마지막으로 보낸 이모티콘에서 수열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상상된다.
몸만 컸지 정말 달라진 게 없다니까..
' 형 주말에는 친구랑 전시회 가야 해서 못 볼 것 같고.. '
' 다음 주 주말 어때? 이제 연락해서 미안해. '
' 사진 잘생겼다. '
답장을 하자마자 사라지는 숫자에 깜짝 놀랐다.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나?
" 아오 씨!! 연애하고 싶어 한다고 걔가 너랑! "
또 생각나버렸다.
윤지한테 그만 하라고 말하려다가 괜히 마음만 싱숭생숭 해졌어..
' 알았어... 😢 여유로울 때 연락해줘 형.. '
' 잘 자 형! 사랑해💕 '
' 사랑해 '라는 말이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인가.
예전에는 자주 했었는데..
" 더 이상 예전이랑 비교하면 안 되겠다.. 수열이도 나 없는 동안 많이 변했을 테고.. "
윤지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수열이랑 연애를 하지 못할 거다.
아마 예전처럼 떠나가는 나를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면 마음이 흔들리겠지만, 그래도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