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직은 어려워
https://www.youtube.com/watch?v=hf_GLTnhIOo
반복되는 하루 속에 특별한 하루가 존재하기에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나도, 그들과 다름없는 똑같은 사람이기에 사소한 하루 속에서 작은 행복을 안고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선생님! 저 이번에 대학교 합격 했어요! "
" 아, 진짜? 다행이다.. "
" 엄마가 선생님한테 이거 드리라고 해서.. "
대학교를 졸업하고, 자취방 주변에 있는 학원에서 알바를 한지 벌써 2년이 넘어가고 있다.
그동안 많은 학생들을 만나왔고 그들을 이끌어 오며 상처 받았던 날 들도 있었지만, 이따금 좋은 결과를 안겨주는 날도 있었다.
내 앞에 있는 학생을 처음 학원에서 만났을 땐 수학은커녕, 전과목이 엉망이라 다른 과목들도 종종 체크를 해줬던 기억이 난다.
학원에서 고용한 알바생 신분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들께 꽤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주말마다 학원을 사용할 수 있었고 이처럼 부족한 학생들을 따로 지도할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생겼다.
그녀는 습득력이 없던 학생이 아니었기에 하나를 가르쳐주면 응용을 하는 능력이 뛰어나 발전 속도도 빨랐고,
지금까지 준비해온 시간을 지나 당일에 합격 소식을 듣고는 나에게 바로 달려온 것이다.
그녀의 손을 거쳐 내 손에 쥐어진 3개의 알록달록한 과일이 담겨있는 병들이 지금까지의 시간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앞으로 대학교에 가서 해야 할 일들과 몇 가지의 조언을 해주니 더욱 밝아지는 얼굴로 열심히 다니겠다고 말해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도 남들과 다름없는 행복을 안고 오늘도 살아가고 있구나를 느낀다.
학원 선생님들은 고3의 입시가 끝나면 곧이어 올라오는 고2들의 입시를 위해 또 달려야한다.
하지만, 고3의 발표 기간 동안에는 학생들이 학원에 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 널널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지 못 했던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 간의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야아! 민시형! 여기야 여기! "
" 미안, 얼마나 기다렸어? "
" 기다리긴 뭘~ 야! 예쁘게 입고 오라니까! "
멀리서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장신의 여자가 걸어온다.
대체적으로 검은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스타일이 좋은 여자는 바로 내가 졸업한 대학교 퀴어 동아리 회장인 윤지다.
그녀의 손가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빙빙 돌려지고 있는 차키가 곧장이라도 나에게 날아올 것 같지만
그런 건 전혀 신경 안 쓴다는 듯이 털털하게 걸어온 그녀는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 호탕하게 웃으며 번화가를 걸어간다.
" 하여튼, 민시형 너는 얼굴을 너무 못 쓴다니까? "
" 하하.. 그래도 열심히 꾸민 건데.. "
" 그렇게 입고 돌아다니면 그냥 동정인 줄 알고 피해 간다고~ "
아직까지도 그녀가 말하는 ' 예쁘다. ' 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예쁘게 입고 온 건데..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이기도 하고, 얼굴을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번화가라는 명칭에 맞게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이 곳은 성소수자들이 다니는 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짱을 끼고 있는 동성 커플들을 대부분 볼 수 있고, 심하게는 밤늦게 골목에서 입을 맞추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오늘은 만나서 간단하게 사는 이야기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라 부담 없이 나왔는데..
분명 오전까지만 해도 사소한 행복에 하루를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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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와 한 잔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많은 사람들이 두 남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게 멀리서 보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는지 2층 건물에 있는 사람들도 고개를 내빼고 그 장면을 보고 있었기에 궁금했지만, 저런 치정극에 괜히 관심을 보이면 볼똥 튈 수 있기 때문에 길을 돌아가려고 했는데..
인파들을 피해서 다닌다는게 쏠려버려서 결국 그 남자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오고 말았다.
' 워후, 잘생겼네. 쟤 연예인 아냐? ' 라며 꽤 흥미롭게 싸움을 바라보고 있던 윤지가 갑자기 눈이 커지며 벌어진 입을 손바닥으로 가린다. 뭘 봤길래 그렇게 놀란 거지? 연예인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아니다, 이런 거리에서 연예인의 치정극을 볼 수 있는 건 정말 희귀하기 때문에 놀랐을 수도 있는거지..
" 네가 그렇게 잘났냐고! 얼굴만 존나 잘생기면 어디에 써먹는데! 성격이 그따위니까 읍..! "
" 그런 얼굴, 네가 좋아서 지금 발악하는 거 아닌가? "
" 시, 이바 놔! 놓으라고! "
" 더이상 할 이야기 없으니까 다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태인씨. "
태인이라는 남자를 거리 한복판에 두고 자리를 떠나는 남자. 그가 지나가는 길로 모든 사람들이 길을 열어주는데 하필 그가 이쪽으로 와버리는 바람에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검은색 머리칼에 검은색 눈동자.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들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소설이나 만화 속에서 나온 주인공처럼 잘빠진 그 남자는 '검은색' 이라는 교요하고 섹시한 색의 특징을 제대로 뽐내고 다니는 사람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색함과 당황스러움에 눈을 재빠르게 돌렸고, 동시에 그 남자는 눈웃음을 보이곤 수많은 인파들 속에 파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곧이어 남자가 사라지자 태인이라는 남자 또한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사람들 또한 자신들의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거리도 정리가 되었고,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우리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녀를 쳐다보자, 아직도 그 남자가 지나간 거리를 보고 있다.
" 와.. 대박. "
" 으응..? "
" 저 사람 그 사람이잖아. 내가 너랑 작년에 사진관 데려갔던 곳 작가. "
" 응? "
그녀가 미술 전공이기도 하고, 그녀와 함께 갔던 미술관이나 사진관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중 어느 곳을 말하는.. 아!
작년 11월에 윤지와 함께 전시회를 보러 갔는데 사진들이 다 마음에 들어서 기억에 남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이름이..
이 권..
" 이권도. "
" 아..! 그 작가 사진 좋았는데.. "
" 아니 이 바보야! 방금 이권도가 치정극을 벌인 주인공이라니까!? "
" 그게, 뭐가 어때..서? "
그녀에게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어서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쉰다.
뭔가 원하는 대답이 있어서 그러는 걸까..? 한참을 생각해보지만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다.
도대체 뭘 말하는 거지..? 잘나가는 작가가 연예인이랑 사귀다가 치정극이 벌어진 거..?
그렇다면 음, 아..
" 우와.. 정말 어떡하지..? "
정말 심각하게 걱정을 하자,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가 결국 웃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내 어깨에 팔을 걸치더니 그녀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웃었으니 된건가..?
차 앞에 스자마자 호탕하게 웃던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리 작은 키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 앞에서는 남동생처럼 작아지는 나였기에 그저 헤실 웃으니 한숨을 또다시 푹 내쉰다.
" 넌 언제 연애할래? "
" 연애? 글쎄.. 아직은 생각 없는데. 그리고 만날 기회도 없고. "
" 사실 오늘 너한테 소개시켜줄 사람 있었는데 당일에 약속을 또 잡았더라고, 그 자식이.. "
" 그 약속이 더 중요했을 수도 있지.. "
" 에휴, 너무 순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
매년마다 반복되는 그녀의 걱정에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늘 괜찮다는 긍정의 미소뿐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느낀적도 없고 급하게 만난 인연이 나에겐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도 나에게는 큰 상처로 다가오기 때문에 아직까지 연애가 어렵다.
내 연애 사정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녀가 나에게 연애를 권유하는 이유는
윤지가 만나고 있는 사람은 다정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녀가 심적으로 불안하거나 힘들 때 견딜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늘 혼자 앓고 있는 나를 보며 얼른 연애를 했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 대상을 찾는게 가장 힘들고, 나 또한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평생 그녀와 같이 행복한 연애를 하지 못할 걸 알고 있기에.. 그냥 웃어주는 게 최선의 대답일 뿐.
" 누나 가니깐 무슨 일 있으면 또 연락하고, 알겠냐? "
" 응응 .. "
간다는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여자 친구가 도착했고,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커플들에게 나 또한 웃음으로 답을 해줬다. 손을 잡고 차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들을 보며 내 친구이기도 하지만 예쁘게 사귀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에게도 저런 연애를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과연 내가 마음을 열고 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까?
이런저런 생각에 생각이 많아지는 밤..
나를 스쳐 지나가는 차를 바라보며 오늘 내게 안긴 작은 행복을 안고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